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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랜드해 전투 Atlantik-Landmeer-Schlacht Battle of the Atlantic–Land Sea | |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기간 | |
장소 | |
북대서양 및 랜드 내해 북부 해역 | |
원인 | |
교전국 및 세력 | |
연합군 | 추축군 |
지휘관 | |
전력 | |
전함 9척 항공모함 4척 순양함 27척 구축함 110여 척 호송 상선 2,400여 척 | 전함 4척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구축함 30여 척 |
결과 | |
연합군의 전략적 승리 독일 수상함대의 대서양 돌파 저지 및 해상 교통로 유지 | |
영향 | |
독일 수상함 통상파괴전의 사실상 종결 루이나 호송선단 체계의 확립과 전시 생산·수리 체계 우위 입증 | |
피해 규모 | |
상선 340여 척 침몰 전함 1척·순양함 3척·구축함 12척 상실 전사·실종 약 11,000명 | 전함 1척·중순양함 2척 침몰 다수 함정 대파 후 장기 수리 전사·실종 약 4,700명 |
1. 개요2. 배경
2.1. 독일 해군의 재건과 Z계획 (1935~1939)2.2. 루이나 경제의 해상 교통로 의존2.3. 함대결전 교리와 루이나 해군의 정체2.4. 개전과 위장 평화기 (1939년 9월~1940년 4월)
3. 전개3.1. 개전: 북해 돌파전 (1940년 4월)3.2. 위장순양함과 첫 습격 (1940년 5월~8월)3.3. 장갑함 출격과 선단 학살 (1940년 9월~11월)3.4. 란츠 개혁: 호송선단 체계의 확립 (1940년 12월~1941년 1월)3.5. 뤼첸스의 내해 침입 작전 (1941년 1월~3월)3.6. 루이나 해군 최악의 날 (1941년 5월 24일)3.7. 사흘간의 추격전 (1941년 5월 24일~27일)3.8. 잔존 함대의 항구 봉쇄와 항공 소모전 (1941년 6월~8월)3.9. 중순양함대의 마지막 출격 (1941년 9월~10월)3.10. 랜드 내해 북부 해전과 종결 (1941년 11월 27일)
4. 결과5. 영향1. 개요 [편집]
1940년 4월 9일부터 1941년 11월 27일까지 북대서양과 랜드 내해 북부 해역에서 연합군과 독일 해군 수상함대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해상 교전을 통칭하는 표현.
단일 전투가 아니라, 독일 수상함대가 루이나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벌인 통상파괴전과 이를 저지하려는 연합군의 호송·추격 작전이 약 1년 7개월에 걸쳐 이어진 장기 소모전이다. 대서양 전투가 주로 유보트를 상대로 한 대잠전이었다면, 이 전투는 전함과 중순양함 등 수상함 전력이 통상파괴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연합군은 상선 340여 척과 전함 1척을 포함한 다수의 함정, 약 11,000명의 인명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독일 수상함대의 대서양 돌파를 저지하고 해상 교통로를 끝까지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독일은 전함 1척과 중순양함 2척을 상실하고 함대사령관 귄터 뤼첸스까지 전사하면서, 이 전투를 끝으로 수상함에 의한 통상파괴전을 사실상 포기하게 된다.
단일 전투가 아니라, 독일 수상함대가 루이나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벌인 통상파괴전과 이를 저지하려는 연합군의 호송·추격 작전이 약 1년 7개월에 걸쳐 이어진 장기 소모전이다. 대서양 전투가 주로 유보트를 상대로 한 대잠전이었다면, 이 전투는 전함과 중순양함 등 수상함 전력이 통상파괴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연합군은 상선 340여 척과 전함 1척을 포함한 다수의 함정, 약 11,000명의 인명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독일 수상함대의 대서양 돌파를 저지하고 해상 교통로를 끝까지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독일은 전함 1척과 중순양함 2척을 상실하고 함대사령관 귄터 뤼첸스까지 전사하면서, 이 전투를 끝으로 수상함에 의한 통상파괴전을 사실상 포기하게 된다.
2. 배경 [편집]
2.1. 독일 해군의 재건과 Z계획 (1935~1939) [편집]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 해군에 배수량 1만 톤 이하의 구식 전함 6척과 경순양함 6척만을 허용했고, 잠수함과 항공모함의 보유는 전면 금지했다. 한때 세계 2위를 자랑하던 독일 해군은 조약 체제 아래서 사실상 발트해 연안 경비대 수준으로 전락했으며, 스캐퍼플로에서 자침한 대양함대의 기억은 해군 내부에 굴욕과 설욕 의지로 남아 있었다.
재건의 첫 신호탄은 조약의 틀 안에서 나왔다. 1만 톤 제한을 지키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이를 초과하는 배수량에 28cm 주포와 디젤 기관을 얹은 장갑함, 이른바 '포켓 전함'이 1930년대 초 차례로 취역한 것이다. 순양함을 압도하는 화력과 전함을 뿌리치는 속력, 그리고 디젤 기관이 보장하는 긴 항속거리라는 조합은 함대결전이 아니라 대양에서의 통상파괴를 위해 설계된 것이었다. 열강 해군이 이 함종의 등장에 대응해 신형 순양전함 건조에 나섰을 정도로, 포켓 전함은 등장 자체만으로 건함 경쟁의 방아쇠를 당겼다.
1935년 영독 해군 협정은 재무장에 합법의 외피를 입혀주었다. 영국 해군력의 35% 수준까지 수상함 보유를 인정받은 독일은 기다렸다는 듯 순양전함 2척을 기공했고, 뒤이어 유럽 최대급의 신형 전함 2척의 건조에 착수했다. 서류상 협정의 톤수 제한을 준수한다고 신고된 이 전함들의 실제 배수량이 신고치를 크게 웃돌았다는 사실은 개전 후에야 드러났다. 같은 시기 항공모함 1척도 기공되었으나, 해군과 공군 사이의 관할권 다툼 속에 공정은 지지부진했고 이 배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문제는 이 함대를 무엇에 쓸 것인가였다. 해군 내부에서는 에리히 레더를 중심으로 한 대수상함파와, 잠수함 집중 건조를 주장하는 유보트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레더는 잠수함이 보조 전력에 불과하며 대양에서 적의 해상 교통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은 균형 잡힌 수상함대뿐이라고 보았고, 이 노선의 결정판이 1939년 초 총통의 재가를 받은 Z계획이었다. 전함 10척, 항공모함 4척, 신형 장갑함 15척, 순양함 수십 척을 1948년까지 갖춘다는 이 구상은 완성될 경우 영국 해군과의 정면 대결까지 상정한 대해군 건설 계획이었으며, 이를 위해 육군·공군에 앞서는 자원 배분 우선권까지 부여받았다.
그러나 Z계획의 전제는 '전쟁은 빨라야 1944년 이후'라는 것이었다. 1939년 9월 전쟁이 발발하자 계획은 착공 단계의 함선 몇 척을 남기고 전면 중단되었고, 독일 해군은 전함 2척과 순양전함 2척, 포켓 전함 3척이 전부인 미완성 함대로 세계 최대의 해군 연합과 마주하게 되었다. 개전 소식을 들은 레더가 "수상함대는 너무나 미약하여, 할 수 있는 것은 명예롭게 싸우다 죽는 법을 보여주는 것뿐"이라는 비관적인 기록을 남겼을 정도였다.
역설적으로 이 절대적 열세가 독일 해군의 전략을 명확하게 만들었다. 함대결전으로는 승산이 없는 이상, 남은 길은 우세한 적 함대를 회피하며 적의 가장 약한 고리, 즉 해상 교통로를 때리는 것뿐이었다. 포켓 전함부터 최신예 전함까지, 독일 수상함대의 모든 함정은 이제 통상파괴함으로 운용될 것이었고, 그 사냥터로 지목된 것이 바로 루이나의 생명선이 지나는 대서양-랜드 내해 항로였다.
재건의 첫 신호탄은 조약의 틀 안에서 나왔다. 1만 톤 제한을 지키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이를 초과하는 배수량에 28cm 주포와 디젤 기관을 얹은 장갑함, 이른바 '포켓 전함'이 1930년대 초 차례로 취역한 것이다. 순양함을 압도하는 화력과 전함을 뿌리치는 속력, 그리고 디젤 기관이 보장하는 긴 항속거리라는 조합은 함대결전이 아니라 대양에서의 통상파괴를 위해 설계된 것이었다. 열강 해군이 이 함종의 등장에 대응해 신형 순양전함 건조에 나섰을 정도로, 포켓 전함은 등장 자체만으로 건함 경쟁의 방아쇠를 당겼다.
1935년 영독 해군 협정은 재무장에 합법의 외피를 입혀주었다. 영국 해군력의 35% 수준까지 수상함 보유를 인정받은 독일은 기다렸다는 듯 순양전함 2척을 기공했고, 뒤이어 유럽 최대급의 신형 전함 2척의 건조에 착수했다. 서류상 협정의 톤수 제한을 준수한다고 신고된 이 전함들의 실제 배수량이 신고치를 크게 웃돌았다는 사실은 개전 후에야 드러났다. 같은 시기 항공모함 1척도 기공되었으나, 해군과 공군 사이의 관할권 다툼 속에 공정은 지지부진했고 이 배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문제는 이 함대를 무엇에 쓸 것인가였다. 해군 내부에서는 에리히 레더를 중심으로 한 대수상함파와, 잠수함 집중 건조를 주장하는 유보트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레더는 잠수함이 보조 전력에 불과하며 대양에서 적의 해상 교통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은 균형 잡힌 수상함대뿐이라고 보았고, 이 노선의 결정판이 1939년 초 총통의 재가를 받은 Z계획이었다. 전함 10척, 항공모함 4척, 신형 장갑함 15척, 순양함 수십 척을 1948년까지 갖춘다는 이 구상은 완성될 경우 영국 해군과의 정면 대결까지 상정한 대해군 건설 계획이었으며, 이를 위해 육군·공군에 앞서는 자원 배분 우선권까지 부여받았다.
그러나 Z계획의 전제는 '전쟁은 빨라야 1944년 이후'라는 것이었다. 1939년 9월 전쟁이 발발하자 계획은 착공 단계의 함선 몇 척을 남기고 전면 중단되었고, 독일 해군은 전함 2척과 순양전함 2척, 포켓 전함 3척이 전부인 미완성 함대로 세계 최대의 해군 연합과 마주하게 되었다. 개전 소식을 들은 레더가 "수상함대는 너무나 미약하여, 할 수 있는 것은 명예롭게 싸우다 죽는 법을 보여주는 것뿐"이라는 비관적인 기록을 남겼을 정도였다.
역설적으로 이 절대적 열세가 독일 해군의 전략을 명확하게 만들었다. 함대결전으로는 승산이 없는 이상, 남은 길은 우세한 적 함대를 회피하며 적의 가장 약한 고리, 즉 해상 교통로를 때리는 것뿐이었다. 포켓 전함부터 최신예 전함까지, 독일 수상함대의 모든 함정은 이제 통상파괴함으로 운용될 것이었고, 그 사냥터로 지목된 것이 바로 루이나의 생명선이 지나는 대서양-랜드 내해 항로였다.
2.2. 루이나 경제의 해상 교통로 의존 [편집]
루이나는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며 공업 생산력에서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으나, 그 성장 방식 자체가 태생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좁은 국토와 한정된 자원 기반 위에서 이룬 공업화였기에, 원료를 수입해 가공하고 완제품을 수출하는 가공무역형 경제 구조가 굳어진 것이다. 도시화와 인구 증가로 식량 자급마저 무너지면서, 전쟁 직전 기준으로 루이나는 국민이 소비하는 식량의 약 절반, 석유의 9할, 철광석과 고무 등 주요 전략 자원의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수입의 압도적 비중이 지나는 길이 대서양 항로였다. 아메리카 대륙의 곡물과 석유, 각지 식민지와 자치령의 원자재가 대서양을 건너 랜드 내해 북부의 관문 항구들로 들어왔고, 여기서 루이나 전역의 공업지대로 분배되었다. 루이나가 보유한 상선대는 총 톤수 기준 세계 유수의 규모였으나, 이는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잃을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간기 루이나 경제학계에서 이미 "루이나는 90일치의 식량과 60일치의 석유 위에 떠 있는 나라"라는 경구가 회자되고 있었는데, 이는 해상 수입이 완전히 끊길 경우 국가 기능이 마비되기까지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생명선의 지리적 취약성이었다. 대서양에서 랜드 내해로 진입하는 해역은 폭이 제한된 길목으로, 루이나로 향하는 거의 모든 선박이 예측 가능한 소수의 항로에 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넓은 대양에서라면 상선 한 척을 찾는 일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지만, 이 길목에서는 통상파괴함이 자리만 잡고 기다리면 사냥감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셈이었다. 게다가 이 해역은 겨울철 폭풍과 짙은 안개가 잦아 초계기와 감시함의 눈이 자주 멀었고, 습격함이 치고 빠지기에 이상적인 기상 조건까지 갖추고 있었다.
지정학적 상황은 이 취약성을 한층 악화시켰다. 노르웨이 연안이 적대 세력의 손에 들어갈 경우, 독일 함대는 북해의 연합군 초계망을 우회해 피오르의 깊숙한 정박지에서 출격, 단 며칠의 항해로 이 길목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반대로 연합군 입장에서 이를 막으려면 광대한 북방 해역 전체에 초계선을 유지해야 했으니, 공격 측은 시간과 장소를 고르는 반면 방어 측은 모든 시간, 모든 장소를 지켜야 하는 전형적인 비대칭 구도였다.
독일 해군이 이 약점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후 노획 문서로 확인되었다. 개전 전 독일 해군 참모부가 작성한 대(對)루이나 전쟁 연구는 이 해역을 '루이나의 경동맥(Halsschlagader Luinas)'이라 명명하고, "루이나를 굴복시키는 데 필요한 것은 그 함대의 격멸이 아니라 월 60만 톤의 상선 격침"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Z계획의 함대 구성이 항속거리가 긴 통상파괴함 위주로 짜인 것도, 개전 후 독일 수상함대의 작전 목표가 일관되게 이 해역을 향한 것도 이 연구의 연장선에 있었다.
더 심각한 것은 루이나 측도 이 약점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간기 동안 해군 일각과 민간 연구자들이 여러 차례 해상 교통로 방호 문제를 제기했고, 1930년대 중반 의회에 제출된 한 보고서는 "적성국이 통상파괴전을 채택할 경우 6개월 내 배급제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는 번번이 묵살되었다. 해군 주류는 함대결전에서 승리하면 교통로는 자동으로 지켜진다는 교리적 확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정치권은 막대한 호위함 건조 예산을 "일어나지도 않은 전쟁에 대한 보험료"로 치부했다.
결국 루이나는 세계에서 해상 봉쇄에 가장 취약한 경제 구조를 가진 채, 그 방호에는 가장 무관심한 상태로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모순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당시 루이나 해군을 지배하고 있던 교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수입의 압도적 비중이 지나는 길이 대서양 항로였다. 아메리카 대륙의 곡물과 석유, 각지 식민지와 자치령의 원자재가 대서양을 건너 랜드 내해 북부의 관문 항구들로 들어왔고, 여기서 루이나 전역의 공업지대로 분배되었다. 루이나가 보유한 상선대는 총 톤수 기준 세계 유수의 규모였으나, 이는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잃을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간기 루이나 경제학계에서 이미 "루이나는 90일치의 식량과 60일치의 석유 위에 떠 있는 나라"라는 경구가 회자되고 있었는데, 이는 해상 수입이 완전히 끊길 경우 국가 기능이 마비되기까지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생명선의 지리적 취약성이었다. 대서양에서 랜드 내해로 진입하는 해역은 폭이 제한된 길목으로, 루이나로 향하는 거의 모든 선박이 예측 가능한 소수의 항로에 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넓은 대양에서라면 상선 한 척을 찾는 일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지만, 이 길목에서는 통상파괴함이 자리만 잡고 기다리면 사냥감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셈이었다. 게다가 이 해역은 겨울철 폭풍과 짙은 안개가 잦아 초계기와 감시함의 눈이 자주 멀었고, 습격함이 치고 빠지기에 이상적인 기상 조건까지 갖추고 있었다.
지정학적 상황은 이 취약성을 한층 악화시켰다. 노르웨이 연안이 적대 세력의 손에 들어갈 경우, 독일 함대는 북해의 연합군 초계망을 우회해 피오르의 깊숙한 정박지에서 출격, 단 며칠의 항해로 이 길목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반대로 연합군 입장에서 이를 막으려면 광대한 북방 해역 전체에 초계선을 유지해야 했으니, 공격 측은 시간과 장소를 고르는 반면 방어 측은 모든 시간, 모든 장소를 지켜야 하는 전형적인 비대칭 구도였다.
독일 해군이 이 약점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후 노획 문서로 확인되었다. 개전 전 독일 해군 참모부가 작성한 대(對)루이나 전쟁 연구는 이 해역을 '루이나의 경동맥(Halsschlagader Luinas)'이라 명명하고, "루이나를 굴복시키는 데 필요한 것은 그 함대의 격멸이 아니라 월 60만 톤의 상선 격침"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Z계획의 함대 구성이 항속거리가 긴 통상파괴함 위주로 짜인 것도, 개전 후 독일 수상함대의 작전 목표가 일관되게 이 해역을 향한 것도 이 연구의 연장선에 있었다.
더 심각한 것은 루이나 측도 이 약점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간기 동안 해군 일각과 민간 연구자들이 여러 차례 해상 교통로 방호 문제를 제기했고, 1930년대 중반 의회에 제출된 한 보고서는 "적성국이 통상파괴전을 채택할 경우 6개월 내 배급제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는 번번이 묵살되었다. 해군 주류는 함대결전에서 승리하면 교통로는 자동으로 지켜진다는 교리적 확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정치권은 막대한 호위함 건조 예산을 "일어나지도 않은 전쟁에 대한 보험료"로 치부했다.
결국 루이나는 세계에서 해상 봉쇄에 가장 취약한 경제 구조를 가진 채, 그 방호에는 가장 무관심한 상태로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모순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당시 루이나 해군을 지배하고 있던 교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3. 함대결전 교리와 루이나 해군의 정체 [편집]
아이러니하게도 개전 시점의 루이나 해군은 이 위협에 대응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뿌리는 루이나 해군의 성공 경험 그 자체에 있었다. 루이나 해군은 과거 국가의 명운이 걸린 함대 결전에서 승리한 기억을 조직의 정체성으로 삼아 성장한 군대였고, 이 승리의 신화는 세대를 거치며 "해양의 지배권은 단 한 번의 결전으로 결정된다"는 교리적 확신으로 굳어졌다. 여기에 전간기 세계 해군을 풍미한 머핸류 해양력 사상이 수입되면서, 함대결전 교리는 반박 불가능한 정통 교의의 지위를 얻었다. 사관학교의 교육과정은 주력함 포술과 함대 기동에 집중되었고, 도상 훈련은 언제나 '결전 해역으로 향하는 적 주력 함대'를 상정하고 짜였다.
이 교리는 함대의 물리적 구성에 그대로 새겨졌다. 예산의 압도적 비중이 전함과 순양전함의 건조·유지에 투입되었고, 함대의 건제는 전함 전대를 정점으로 한 결전 서열 그 자체였다. 반면 호위함은 '보조함정'이라는 이름 아래 예산 심의 때마다 가장 먼저 삭감되는 항목이었으며, 대잠 장비와 대공 화기의 개발은 민간 기술에 의존하다시피 했다. 개전 시점에 루이나 해군이 보유한 전문 호위함은 노후 구축함을 개조한 소수에 불과했고, 상선 보호를 전담하는 상설 사령부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함대는 훌륭한 창이었지만, 방패는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인사 구조는 이 편향을 재생산했다. 전함 함장과 함대 참모를 거치는 것이 제독으로 가는 유일한 정통 코스였고, 호위·초계·소해 병과는 '한직'으로 통했다. 자연히 야심 있는 장교들은 통상 보호 임무를 기피했으며, 그 분야에 남은 이들은 승진 심사에서 조직적으로 불이익을 받았다. 통상 보호와 호위함 중심의 함대 재편을 주장하던 소장파 장교들은 '순양함 학파'라는, 절반은 조롱이 섞인 이름으로 불리며 주류에서 밀려나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논리로 반박되기보다는 "전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의 넋두리"로 치부되었는데, 함대결전 교리가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에 들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시기 한직을 전전하던 테오도르 란츠가 순양함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무관으로 파견되어 제1차 세계 대전기 대서양의 통상파괴전을 직접 관찰했던 란츠는, 미래의 해전이 함대 간의 결전이 아니라 교통로를 둘러싼 소모전이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1937년 해군 수뇌부에 제출한 「해상 교통 방호에 관한 의견서」는 이 확신의 집대성으로, 유사시 상선 독립 항행의 전면 금지와 호송선단 의무화, 호위함 200척의 단계적 건조, 해상교통로 전담 사령부의 창설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의견서는 부속 문서에서 통상파괴전 개시 후 월별 상선 손실을 추산하는 도상 계산까지 첨부하고 있었는데, 전후 검증 결과 이 추산치는 1940년의 실제 손실과 오차 범위 내에서 일치했다.
수뇌부의 반응은 싸늘했다. 의견서는 "함대의 공세 정신을 갉아먹는 패배주의적 발상"이라는 혹평과 함께 기각되었고, 심사 위원 중 한 명은 여백에 "호위함 200척의 예산이면 전함 3척을 만들 수 있다. 전함 3척이면 애초에 적이 바다로 나오지 못한다"라고 적어 넣었다. 이 메모는 함대결전 교리의 사고방식을 압축한 문장으로 후대에 자주 인용된다. 란츠 본인은 이 사건 이후 사실상 좌천되어 예비역 편입설까지 돌았으나,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바다가 증명해 줄 것이므로" 전역 대신 잔류를 택했다.
교리의 관성은 개전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1939년 9월 유럽 개전 소식에 루이나 해군 수뇌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력 함대를 결전 대비 태세로 남부 주 정박지에 집결시키는 것이었고, 북부 교통로의 초계는 무장상선순양함과 퇴역 직전의 경순양함들에게 맡겨졌다. 훗날 한 전사가는 이 배치를 두고 "금고 문 앞에 전 재산을 쌓아 두고, 금고 안을 지킨 격"이라고 평했다.
결국 1937년의 기각된 의견서가 재발굴되어 란츠 개혁의 청사진이 되기까지, 루이나는 3년의 시간과 수백 척의 상선, 수천 명의 선원을 수업료로 치러야 했다. 그리고 그 수업료의 청구서가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40년 4월이었다.
이 교리는 함대의 물리적 구성에 그대로 새겨졌다. 예산의 압도적 비중이 전함과 순양전함의 건조·유지에 투입되었고, 함대의 건제는 전함 전대를 정점으로 한 결전 서열 그 자체였다. 반면 호위함은 '보조함정'이라는 이름 아래 예산 심의 때마다 가장 먼저 삭감되는 항목이었으며, 대잠 장비와 대공 화기의 개발은 민간 기술에 의존하다시피 했다. 개전 시점에 루이나 해군이 보유한 전문 호위함은 노후 구축함을 개조한 소수에 불과했고, 상선 보호를 전담하는 상설 사령부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함대는 훌륭한 창이었지만, 방패는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인사 구조는 이 편향을 재생산했다. 전함 함장과 함대 참모를 거치는 것이 제독으로 가는 유일한 정통 코스였고, 호위·초계·소해 병과는 '한직'으로 통했다. 자연히 야심 있는 장교들은 통상 보호 임무를 기피했으며, 그 분야에 남은 이들은 승진 심사에서 조직적으로 불이익을 받았다. 통상 보호와 호위함 중심의 함대 재편을 주장하던 소장파 장교들은 '순양함 학파'라는, 절반은 조롱이 섞인 이름으로 불리며 주류에서 밀려나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논리로 반박되기보다는 "전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의 넋두리"로 치부되었는데, 함대결전 교리가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에 들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시기 한직을 전전하던 테오도르 란츠가 순양함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무관으로 파견되어 제1차 세계 대전기 대서양의 통상파괴전을 직접 관찰했던 란츠는, 미래의 해전이 함대 간의 결전이 아니라 교통로를 둘러싼 소모전이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1937년 해군 수뇌부에 제출한 「해상 교통 방호에 관한 의견서」는 이 확신의 집대성으로, 유사시 상선 독립 항행의 전면 금지와 호송선단 의무화, 호위함 200척의 단계적 건조, 해상교통로 전담 사령부의 창설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의견서는 부속 문서에서 통상파괴전 개시 후 월별 상선 손실을 추산하는 도상 계산까지 첨부하고 있었는데, 전후 검증 결과 이 추산치는 1940년의 실제 손실과 오차 범위 내에서 일치했다.
수뇌부의 반응은 싸늘했다. 의견서는 "함대의 공세 정신을 갉아먹는 패배주의적 발상"이라는 혹평과 함께 기각되었고, 심사 위원 중 한 명은 여백에 "호위함 200척의 예산이면 전함 3척을 만들 수 있다. 전함 3척이면 애초에 적이 바다로 나오지 못한다"라고 적어 넣었다. 이 메모는 함대결전 교리의 사고방식을 압축한 문장으로 후대에 자주 인용된다. 란츠 본인은 이 사건 이후 사실상 좌천되어 예비역 편입설까지 돌았으나,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바다가 증명해 줄 것이므로" 전역 대신 잔류를 택했다.
교리의 관성은 개전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1939년 9월 유럽 개전 소식에 루이나 해군 수뇌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력 함대를 결전 대비 태세로 남부 주 정박지에 집결시키는 것이었고, 북부 교통로의 초계는 무장상선순양함과 퇴역 직전의 경순양함들에게 맡겨졌다. 훗날 한 전사가는 이 배치를 두고 "금고 문 앞에 전 재산을 쌓아 두고, 금고 안을 지킨 격"이라고 평했다.
결국 1937년의 기각된 의견서가 재발굴되어 란츠 개혁의 청사진이 되기까지, 루이나는 3년의 시간과 수백 척의 상선, 수천 명의 선원을 수업료로 치러야 했다. 그리고 그 수업료의 청구서가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40년 4월이었다.
2.4. 개전과 위장 평화기 (1939년 9월~1940년 4월) [편집]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루이나는 영국·프랑스와의 동맹 조약에 따라 참전을 선언했으나, 이후 반년간 서부 전선에서 양측 육군이 요새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만 거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해상에서도 주력 함대 간의 전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훗날 '위장 평화기' 혹은 '가짜 전쟁'이라 불리게 되는 이 기간, 신문들은 "선전포고된 평화"라는 자조 섞인 표현을 썼고, 루이나 국내에서는 크리스마스 전에 강화가 성립되리라는 낙관론까지 퍼져 있었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이미 조용한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독일 해군은 개전이 임박했음을 감지한 1939년 8월 말, 장갑함 2척과 보급함들을 미리 대서양의 대기 해역으로 내보낸 상태였다. 개전 선언과 동시에 이들은 통상파괴 작전에 돌입했고, 남대서양과 인도양까지 넘나들며 수개월간 상선 10여 척을 격침했다. 격침 톤수 자체는 크지 않았으나 파장은 그 몇 배였다. 단 한 척의 습격함을 잡기 위해 연합군은 순양함과 항공모함으로 구성된 수색 전대를 8개나 편성해 대양 전역에 뿌려야 했으니, 통상파괴전이 강요하는 비대칭적 소모의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이 초기 습격전은 1939년 12월 남대서양에서 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연합군 순양함 전대가 장갑함 1척을 포착해 손상을 입혔고, 중립국 항구로 피항한 이 배는 수리 기한을 넘기자 출항 직후 승조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스로 배를 폭파해 가라앉혔다. 함장은 며칠 뒤 "함과 운명을 같이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자침 사건은 연합군 측에 개전 후 첫 승전보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나, 동시에 독일 해군 수뇌부에게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단독 항행하는 습격함은 결국 수적 우세에 몰려 소모된다는 것, 따라서 다음 출격은 추격 함대를 정면에서 뿌리칠 수 있는 고속전함 전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론이 이듬해 뤼첸스의 내해 침입 작전으로 이어진다.
한편 루이나 해군에게 위장 평화기는 뒤늦은 각성의 시간이었다. 개전 첫 달, 독립 항행하던 루이나 상선들이 잇따라 습격당하고 여객선 1척이 경고 없이 격침되어 민간인 수백 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터지자, 여론은 해군의 무대책을 격렬하게 성토했다. 의회 국정조사에서 해군이 상선 보호 전담 조직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해군 수뇌부 일부가 경질되었고, 그 공백을 타고 그동안 묵살되어 온 순양함 학파의 주장이 처음으로 정책 테이블에 올랐다. 1939년 말 승인된 호위함 긴급 건조 계획, 이른바 '방패 계획'은 기각되었던 란츠의 1937년 의견서를 사실상 그대로 옮겨 온 것이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조선소의 선대는 이미 주력함 건조와 상선 수주로 가득 차 있었고, 설계 간소화와 민간 조선소 동원에도 불구하고 첫 양산 호위함이 취역하기까지는 아직 1년 이상이 남아 있었다. 해군은 임시방편으로 노후 구축함의 개조와 원양 어선·예인선의 징발로 구멍을 메웠으나, 이 급조 호위 전력의 실태는 "잠수함을 쫓기에는 느리고, 전함에게서 도망치기에는 더 느린 배들"이라는 당시 한 호위함장의 자조로 요약된다. 결국 위장 평화기의 루이나는 올바른 처방전을 손에 쥐고도 약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환자의 처지였다.
그 기다림의 끝은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최악의 방향에서 왔다. 1940년 초부터 연합군 정보망에는 독일군의 스칸디나비아 방면 움직임을 시사하는 첩보가 누적되고 있었고, 2월에는 노르웨이 영해에서 독일 보급함이 연합군 구축함에 나포되는 사건이 벌어져 양측의 긴장이 한계까지 치솟았다. 루이나와 영국 수뇌부는 노르웨이 연안이 독일의 손에 들어갈 경우 북방 초계망 전체가 무력화된다는 점을 뒤늦게 인식하고 대응 상륙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으나, 결단은 번번이 미뤄졌다. 그리고 1940년 4월 9일 새벽, 독일군이 먼저 움직였다. 반년의 위장 평화가 끝나고, 대서양-랜드해 전투의 막이 오른 것이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이미 조용한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독일 해군은 개전이 임박했음을 감지한 1939년 8월 말, 장갑함 2척과 보급함들을 미리 대서양의 대기 해역으로 내보낸 상태였다. 개전 선언과 동시에 이들은 통상파괴 작전에 돌입했고, 남대서양과 인도양까지 넘나들며 수개월간 상선 10여 척을 격침했다. 격침 톤수 자체는 크지 않았으나 파장은 그 몇 배였다. 단 한 척의 습격함을 잡기 위해 연합군은 순양함과 항공모함으로 구성된 수색 전대를 8개나 편성해 대양 전역에 뿌려야 했으니, 통상파괴전이 강요하는 비대칭적 소모의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이 초기 습격전은 1939년 12월 남대서양에서 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연합군 순양함 전대가 장갑함 1척을 포착해 손상을 입혔고, 중립국 항구로 피항한 이 배는 수리 기한을 넘기자 출항 직후 승조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스로 배를 폭파해 가라앉혔다. 함장은 며칠 뒤 "함과 운명을 같이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자침 사건은 연합군 측에 개전 후 첫 승전보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나, 동시에 독일 해군 수뇌부에게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단독 항행하는 습격함은 결국 수적 우세에 몰려 소모된다는 것, 따라서 다음 출격은 추격 함대를 정면에서 뿌리칠 수 있는 고속전함 전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론이 이듬해 뤼첸스의 내해 침입 작전으로 이어진다.
한편 루이나 해군에게 위장 평화기는 뒤늦은 각성의 시간이었다. 개전 첫 달, 독립 항행하던 루이나 상선들이 잇따라 습격당하고 여객선 1척이 경고 없이 격침되어 민간인 수백 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터지자, 여론은 해군의 무대책을 격렬하게 성토했다. 의회 국정조사에서 해군이 상선 보호 전담 조직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해군 수뇌부 일부가 경질되었고, 그 공백을 타고 그동안 묵살되어 온 순양함 학파의 주장이 처음으로 정책 테이블에 올랐다. 1939년 말 승인된 호위함 긴급 건조 계획, 이른바 '방패 계획'은 기각되었던 란츠의 1937년 의견서를 사실상 그대로 옮겨 온 것이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조선소의 선대는 이미 주력함 건조와 상선 수주로 가득 차 있었고, 설계 간소화와 민간 조선소 동원에도 불구하고 첫 양산 호위함이 취역하기까지는 아직 1년 이상이 남아 있었다. 해군은 임시방편으로 노후 구축함의 개조와 원양 어선·예인선의 징발로 구멍을 메웠으나, 이 급조 호위 전력의 실태는 "잠수함을 쫓기에는 느리고, 전함에게서 도망치기에는 더 느린 배들"이라는 당시 한 호위함장의 자조로 요약된다. 결국 위장 평화기의 루이나는 올바른 처방전을 손에 쥐고도 약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환자의 처지였다.
그 기다림의 끝은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최악의 방향에서 왔다. 1940년 초부터 연합군 정보망에는 독일군의 스칸디나비아 방면 움직임을 시사하는 첩보가 누적되고 있었고, 2월에는 노르웨이 영해에서 독일 보급함이 연합군 구축함에 나포되는 사건이 벌어져 양측의 긴장이 한계까지 치솟았다. 루이나와 영국 수뇌부는 노르웨이 연안이 독일의 손에 들어갈 경우 북방 초계망 전체가 무력화된다는 점을 뒤늦게 인식하고 대응 상륙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으나, 결단은 번번이 미뤄졌다. 그리고 1940년 4월 9일 새벽, 독일군이 먼저 움직였다. 반년의 위장 평화가 끝나고, 대서양-랜드해 전투의 막이 오른 것이다.
3. 전개 [편집]
3.1. 개전: 북해 돌파전 (1940년 4월) [편집]
1940년 4월 9일 새벽, 독일군은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대한 동시 침공을 개시했다. 작전의 성패는 전적으로 해군에 달려 있었다. 상륙 부대를 태운 함정들이 연합군 초계망이 깔린 북해를 종단해 나르비크까지, 6개 항구에 동시 상륙해야 했기 때문이다. 에리히 레더는 이 작전을 "해전사의 모든 법칙에 반하는 도박"이라 부르면서도 함대의 사실상 전부를 밀어 넣었다. 도박의 판돈은 명확했다. 성공하면 독일 해군은 대서양으로 나가는 뒷문과 루이나의 생명선을 겨눌 전진 기지를 동시에 얻는 것이었고, 실패하면 수상함대의 소멸이었다.
연합군은 기습을 당했다. 공교롭게도 침공 전날 연합군 역시 노르웨이 영해에 기뢰를 부설하는 작전을 진행 중이어서 상당수 함정이 해역에 나와 있었으나, 첩보의 단편들은 "독일 함대의 대서양 돌파 시도"로 오판되었고, 함대는 상륙 선단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통상파괴함을 쫓아 엉뚱한 해역으로 북상했다. 루이나 해군의 대응은 더 굼떴다. 함대결전 교리에 따라 남부 주 정박지에 집결해 있던 주력 함대는 출항 준비에만 이틀을 소모했고, 그 사이 노르웨이의 주요 항구들은 차례로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독일 측이 무상으로 노르웨이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침공 당일 오슬로 피오르에서는 노르웨이 연안 요새의 구식 포와 어뢰가 독일 최신예 중순양함 1척을 격침시키는 파란이 벌어졌고, 침공 함대를 호위하던 순양전함 전대는 노르웨이 근해에서 연합군 순양전함 1척과 조우해 악천후 속의 포격전 끝에 손상을 입고 이탈했다. 초계 중이던 연합군 구축함 1척은 독일 중순양함과 단독으로 조우하자 연막을 치고 돌진, 격침당하기 직전 적함의 현측을 들이받아 대파시키고 침몰했다. 함장에게는 사후 최고 무공훈장이 추서되었는데, 훗날 이 서훈의 추천서를 쓴 것이 다름 아닌 적함의 함장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개전 초기의 일화로 회자되었다.
전투의 초점은 곧 최북단의 나르비크로 옮겨갔다. 4월 10일과 13일 두 차례에 걸쳐 연합군 구축함대와 전함이 좁은 피오르 안에 갇힌 독일 구축함대를 습격했고, 그 결과 독일 해군은 보유 구축함의 절반에 해당하는 10척을 한꺼번에 상실했다. 피오르 양안의 산자락 사이에서 벌어진 이 근접 난전은 전술적으로는 연합군의 완승이었으나, 정작 상륙한 독일 산악 부대를 몰아내지는 못했다. 바다에서 이기고 육지에서 지는 이 기묘한 구도는 노르웨이 전역 전체의 축소판이었다.
6월 초 연합군이 노르웨이에서 최종 철수하면서 전역은 독일의 전략적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양측의 손익 계산서는 간단치 않았다. 독일 해군은 노르웨이의 피오르라는 이상적인 출격 기지를 얻었지만, 그 대가로 중순양함 1척과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0척을 잃고 순양전함 2척과 장갑함 1척이 장기 수리에 들어가, 한때 가동 가능한 대형함이 사실상 전무한 상태까지 몰렸다. 특히 구축함대의 궤멸은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다. 이후 독일의 대형함들은 충분한 호위 없이 단독 혹은 2척 단위로 출격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대서양-랜드해 전투 전 기간에 걸쳐 독일 수상함대의 구조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루이나 해군이 치른 수업료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함정 손실 자체는 크지 않았으나, 개전 벽두의 대응 실패는 함대결전 교리의 파산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결전을 위해 아껴 둔 주력 함대는 정작 결전이 벌어질 때 이틀 늦게 도착했고, 그 사이 전략 지도는 돌이킬 수 없이 바뀌어 있었다. 노르웨이 상실로 북방 초계망의 전제가 무너지면서, 이제 독일 함대는 피오르에서 출격해 하루이틀 항해로 루이나의 경동맥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연합군은 기습을 당했다. 공교롭게도 침공 전날 연합군 역시 노르웨이 영해에 기뢰를 부설하는 작전을 진행 중이어서 상당수 함정이 해역에 나와 있었으나, 첩보의 단편들은 "독일 함대의 대서양 돌파 시도"로 오판되었고, 함대는 상륙 선단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통상파괴함을 쫓아 엉뚱한 해역으로 북상했다. 루이나 해군의 대응은 더 굼떴다. 함대결전 교리에 따라 남부 주 정박지에 집결해 있던 주력 함대는 출항 준비에만 이틀을 소모했고, 그 사이 노르웨이의 주요 항구들은 차례로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독일 측이 무상으로 노르웨이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침공 당일 오슬로 피오르에서는 노르웨이 연안 요새의 구식 포와 어뢰가 독일 최신예 중순양함 1척을 격침시키는 파란이 벌어졌고, 침공 함대를 호위하던 순양전함 전대는 노르웨이 근해에서 연합군 순양전함 1척과 조우해 악천후 속의 포격전 끝에 손상을 입고 이탈했다. 초계 중이던 연합군 구축함 1척은 독일 중순양함과 단독으로 조우하자 연막을 치고 돌진, 격침당하기 직전 적함의 현측을 들이받아 대파시키고 침몰했다. 함장에게는 사후 최고 무공훈장이 추서되었는데, 훗날 이 서훈의 추천서를 쓴 것이 다름 아닌 적함의 함장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개전 초기의 일화로 회자되었다.
전투의 초점은 곧 최북단의 나르비크로 옮겨갔다. 4월 10일과 13일 두 차례에 걸쳐 연합군 구축함대와 전함이 좁은 피오르 안에 갇힌 독일 구축함대를 습격했고, 그 결과 독일 해군은 보유 구축함의 절반에 해당하는 10척을 한꺼번에 상실했다. 피오르 양안의 산자락 사이에서 벌어진 이 근접 난전은 전술적으로는 연합군의 완승이었으나, 정작 상륙한 독일 산악 부대를 몰아내지는 못했다. 바다에서 이기고 육지에서 지는 이 기묘한 구도는 노르웨이 전역 전체의 축소판이었다.
6월 초 연합군이 노르웨이에서 최종 철수하면서 전역은 독일의 전략적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양측의 손익 계산서는 간단치 않았다. 독일 해군은 노르웨이의 피오르라는 이상적인 출격 기지를 얻었지만, 그 대가로 중순양함 1척과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0척을 잃고 순양전함 2척과 장갑함 1척이 장기 수리에 들어가, 한때 가동 가능한 대형함이 사실상 전무한 상태까지 몰렸다. 특히 구축함대의 궤멸은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다. 이후 독일의 대형함들은 충분한 호위 없이 단독 혹은 2척 단위로 출격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대서양-랜드해 전투 전 기간에 걸쳐 독일 수상함대의 구조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루이나 해군이 치른 수업료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함정 손실 자체는 크지 않았으나, 개전 벽두의 대응 실패는 함대결전 교리의 파산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결전을 위해 아껴 둔 주력 함대는 정작 결전이 벌어질 때 이틀 늦게 도착했고, 그 사이 전략 지도는 돌이킬 수 없이 바뀌어 있었다. 노르웨이 상실로 북방 초계망의 전제가 무너지면서, 이제 독일 함대는 피오르에서 출격해 하루이틀 항해로 루이나의 경동맥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3.2. 위장순양함과 첫 습격 (1940년 5월~8월) [편집]
노르웨이 전역으로 대형함 대부분이 수리 독에 들어간 1940년 늦봄, 통상파괴전의 첫 주역으로 나선 것은 뜻밖에도 전함이 아니라 화물선이었다. 독일 해군은 쾌속 화물선을 개조해 구식이지만 경순양함급의 15cm 포 6문을 화물창 격벽과 가짜 갑판실 뒤에 숨기고, 어뢰발사관과 기뢰, 수상 정찰기까지 실은 위장순양함들을 차례로 출항시켰다. 겉보기에 이들은 어느 항구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립국 상선이었다. 선체 도색과 가짜 굴뚝, 목재 구조물로 실루엣을 바꾸고, 중립국 국기와 위조 선적 서류까지 갖춘 이 배들은 필요하면 하룻밤 사이에 전혀 다른 배로 '변신'할 수 있었다.
전술은 단순하고 잔혹할 만큼 효과적이었다. 독립 항행 중인 상선에 평범한 상선인 척 접근한 뒤, 사거리 안에 들어오면 위장을 걷어내고 국제신호기로 정선과 무선 침묵을 명령하는 것이다. 응하면 승조원을 포로로 옮기고 배를 격침 혹은 나포했고, 조난 신호를 타전하려 들면 즉시 포격이 쏟아졌다. 1940년 5월부터 8월까지 넉 달 동안 위장순양함 5척은 대서양 남부와 랜드 내해 어귀에서 상선 40여 척, 약 25만 톤을 격침하거나 나포했으며, 그중 한 척은 연합군 초계망이 조밀한 랜드 내해 남부까지 침투해 '유령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톤수보다 무거운 것은 심리적 타격이었다. 위장순양함의 본질은 "모든 상선을 잠재적 군함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이는 바다 위의 신뢰 자체를 무너뜨렸다. 상선들은 수평선에 낯선 배가 보이면 일단 침로를 꺾었고, 조난 신호에 응답하러 가는 것조차 함정을 의심해야 했다. 해운 보험료는 항로에 따라 개전 전의 열 배까지 폭등했으며, 중립국 선사들이 루이나행 수송 계약을 기피하거나 위험 할증료를 요구하면서 수입 물가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격침 상선 몇십 척이 아니라 '어디에도 안전한 바다가 없다'는 인식 그 자체가 무기였던 셈이다.
연합군의 대응은 헛손질의 연속이었다. 위장순양함의 정체가 보고될 때마다 순양함 수색대가 출동했으나, 보고되는 인상착의가 매번 다른 데다 습격 지점과 발견 지점이 수천 킬로미터씩 떨어져 있어 수색은 번번이 빈손으로 끝났다. 6월에는 루이나 무장상선순양함 1척이 위장순양함과 조우해 포격전을 벌였는데, 상선끼리 서로 포를 쏘는 이 기묘한 결투는 양측 모두 화재를 일으킨 채 헤어지는 무승부로 끝났다.
전환점은 8월 17일에 왔다. 랜드 내해 한복판에서 위장순양함 1척이 등화를 밝히고 항행 중이던 루이나 여객선을 야간에 뇌격, 격침시킨 것이다. 위장순양함 측은 등화관제 위반 선박으로 오인했다고 주장했으나 여객선은 국제 규정대로 조명을 켠 상태였고, 승객과 승무원 400여 명 중 구조된 것은 절반이 되지 않았다. 희생자 명단에 어린이 수십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루이나 여론은 폭발했다. 신문들은 이를 '학살'로 규정했고, 그때까지 전쟁을 남의 일처럼 여기던 중립 성향 여론까지 단숨에 돌아섰다.
정치적 후폭풍은 해군의 풍경을 바꿔 놓았다. 사건 2주 만에 의회는 그동안 해운업계의 반대로 표류하던 호송선단 의무화 법안을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켰고, '방패 계획'의 호위함 건조 예산은 심의 없이 증액되었다. 해상교통로 전담 사령부의 창설도 이때 확정되어, 연말 테오도르 란츠의 취임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렸다. 훗날 란츠는 회고록에서 이 시기를 "우리에게 필요했던 모든 권한은 유족들의 분노가 만들어 주었다. 그것이 가장 부끄러운 부분이다"라고 술회했다.
한편 위장순양함들의 활동은 가을로 접어들며 서서히 한계를 드러냈다. 호송선단화가 진행되면서 손쉬운 사냥감이던 독립 항행선이 줄어들었고, 연합군이 상선 검문 절차와 항로 통제를 강화하면서 위장의 효력도 떨어져 갔다. 그러나 이들이 넉 달간 증명한 사실, 즉 소수의 습격함만으로도 루이나의 해상 경제 전체를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은 독일 해군 수뇌부의 확신을 굳혔다. 위장순양함이 이 정도라면, 진짜 군함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수리를 마친 장갑함들이 출격 준비에 들어간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전술은 단순하고 잔혹할 만큼 효과적이었다. 독립 항행 중인 상선에 평범한 상선인 척 접근한 뒤, 사거리 안에 들어오면 위장을 걷어내고 국제신호기로 정선과 무선 침묵을 명령하는 것이다. 응하면 승조원을 포로로 옮기고 배를 격침 혹은 나포했고, 조난 신호를 타전하려 들면 즉시 포격이 쏟아졌다. 1940년 5월부터 8월까지 넉 달 동안 위장순양함 5척은 대서양 남부와 랜드 내해 어귀에서 상선 40여 척, 약 25만 톤을 격침하거나 나포했으며, 그중 한 척은 연합군 초계망이 조밀한 랜드 내해 남부까지 침투해 '유령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톤수보다 무거운 것은 심리적 타격이었다. 위장순양함의 본질은 "모든 상선을 잠재적 군함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이는 바다 위의 신뢰 자체를 무너뜨렸다. 상선들은 수평선에 낯선 배가 보이면 일단 침로를 꺾었고, 조난 신호에 응답하러 가는 것조차 함정을 의심해야 했다. 해운 보험료는 항로에 따라 개전 전의 열 배까지 폭등했으며, 중립국 선사들이 루이나행 수송 계약을 기피하거나 위험 할증료를 요구하면서 수입 물가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격침 상선 몇십 척이 아니라 '어디에도 안전한 바다가 없다'는 인식 그 자체가 무기였던 셈이다.
연합군의 대응은 헛손질의 연속이었다. 위장순양함의 정체가 보고될 때마다 순양함 수색대가 출동했으나, 보고되는 인상착의가 매번 다른 데다 습격 지점과 발견 지점이 수천 킬로미터씩 떨어져 있어 수색은 번번이 빈손으로 끝났다. 6월에는 루이나 무장상선순양함 1척이 위장순양함과 조우해 포격전을 벌였는데, 상선끼리 서로 포를 쏘는 이 기묘한 결투는 양측 모두 화재를 일으킨 채 헤어지는 무승부로 끝났다.
전환점은 8월 17일에 왔다. 랜드 내해 한복판에서 위장순양함 1척이 등화를 밝히고 항행 중이던 루이나 여객선을 야간에 뇌격, 격침시킨 것이다. 위장순양함 측은 등화관제 위반 선박으로 오인했다고 주장했으나 여객선은 국제 규정대로 조명을 켠 상태였고, 승객과 승무원 400여 명 중 구조된 것은 절반이 되지 않았다. 희생자 명단에 어린이 수십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루이나 여론은 폭발했다. 신문들은 이를 '학살'로 규정했고, 그때까지 전쟁을 남의 일처럼 여기던 중립 성향 여론까지 단숨에 돌아섰다.
정치적 후폭풍은 해군의 풍경을 바꿔 놓았다. 사건 2주 만에 의회는 그동안 해운업계의 반대로 표류하던 호송선단 의무화 법안을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켰고, '방패 계획'의 호위함 건조 예산은 심의 없이 증액되었다. 해상교통로 전담 사령부의 창설도 이때 확정되어, 연말 테오도르 란츠의 취임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렸다. 훗날 란츠는 회고록에서 이 시기를 "우리에게 필요했던 모든 권한은 유족들의 분노가 만들어 주었다. 그것이 가장 부끄러운 부분이다"라고 술회했다.
한편 위장순양함들의 활동은 가을로 접어들며 서서히 한계를 드러냈다. 호송선단화가 진행되면서 손쉬운 사냥감이던 독립 항행선이 줄어들었고, 연합군이 상선 검문 절차와 항로 통제를 강화하면서 위장의 효력도 떨어져 갔다. 그러나 이들이 넉 달간 증명한 사실, 즉 소수의 습격함만으로도 루이나의 해상 경제 전체를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은 독일 해군 수뇌부의 확신을 굳혔다. 위장순양함이 이 정도라면, 진짜 군함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수리를 마친 장갑함들이 출격 준비에 들어간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3.3. 장갑함 출격과 선단 학살 (1940년 9월~11월) [편집]
1940년 가을, 노르웨이 전역의 상처를 수습한 독일 해군은 마침내 정규 군함에 의한 통상파괴전에 착수했다. 첫 주자는 디젤 기관의 항속거리를 앞세운 장갑함이었다. 9월 말, 장갑함 1척이 악천후를 틈타 덴마크 해협의 초계선을 돌파해 대서양으로 빠져나갔고, 사전에 배치된 보급함들과 합류하며 사냥터로 향했다. 위장순양함과 달리 장갑함은 숨을 필요가 없었다. 28cm 주포는 어떤 호위함도 사거리 밖에서 찢어발길 수 있었고, 26노트의 속력은 웬만한 추격을 뿌리치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단 하나, 진짜 전함과 마주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11월 5일, 이 장갑함은 대서양 한복판에서 루이나로 향하던 37척 규모의 호송선단 HX-84와 조우했다. 호송선단화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선단의 호위 전력은 14cm 포 몇 문을 얹은 무장상선순양함 저비스베이 단 1척. 장갑함의 실루엣이 수평선에 나타난 순간, 선단의 운명은 산술적으로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호위함장의 판단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선단에 산개와 연막 전개를 명령한 뒤, 자함의 뱃머리를 장갑함 쪽으로 돌렸다. 사거리도, 장갑도, 속력도 상대가 되지 않는 돌격이었다. 장갑함의 주포탄이 명중하기 시작한 뒤에도 호위함은 침로를 바꾸지 않았고, 함교가 날아가고 선체가 불덩이가 된 상태로도 40여 분을 버티며 계속 전진했다. 이 40분 동안 선단의 상선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연막과 스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호위함이 마침내 침몰했을 때, 장갑함이 해가 지기 전까지 따라잡아 격침한 상선은 12척이었다. 나머지 25척은 밤바다 속으로 사라져 살아남았다.
저비스베이의 최후는 즉시 전설이 되었다. 함장에게는 사후 최고 무공훈장이 추서되었고, 생존 승조원들의 증언은 신문 1면과 라디오, 뉴스 영화를 타고 연합국 전역에 퍼졌다. 침몰 직전까지 마스트에 군함기가 걸려 있었다는 증언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되었다. 위장순양함 시기의 공포와 무력감에 짓눌려 있던 루이나 여론에게 이 이야기는 처음으로 주어진 '싸우다 죽은 이야기'였고, 전쟁 채권 포스터부터 신병 모집 광고까지 어디에나 그 이름이 등장했다. 격침당한 쪽이 승리의 상징이 되는 역설이었다.
그러나 해군 내부의 결산은 냉정했다. HX-84의 손실 자체보다 심각한 것은 그 여파였다. 장갑함이 대서양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후 2주간 모든 호송선단의 출항이 중지되었고, 이미 항해 중이던 선단들은 항로를 대폭 우회하느라 수송 일정 전체가 연쇄적으로 붕괴했다. 단 한 척의 습격함이 격침한 것은 상선 12척이지만, 마비시킨 것은 루이나의 해상 수송 체계 전체였던 것이다. 문제의 장갑함은 이후로도 남대서양과 인도양을 5개월간 유유히 누비며 상선 16척을 추가로 격침하고, 연합군 수색 전대들을 조롱하듯 따돌린 끝에 이듬해 봄 본국으로 무사 귀환했다. 단일 수상함 통상파괴 작전으로는 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가장 성공적인 사례였다.
HX-84는 양측 모두의 교리를 바꿔 놓았다. 연합군 측이 얻은 교훈은 명확했다. "전함급 습격함에는 전함급 호위가 필요하다." 이후 주요 선단에는 구식 전함이나 순양전함이 1척씩 배속되기 시작했고, 실제로 12월 랜드 내해 어귀에서 출격을 시도하던 독일 순양전함 전대가 호송선단 호위로 붙어 있던 구식 전함 1척을 발견하고는 교전을 포기한 채 회항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 처방의 효과가 입증되었다. 독일 측 수뇌부도 같은 장면에서 반대 방향의 결론을 끌어냈다. 구식 전함 호위를 정면에서 제압하려면 장갑함이 아니라 고속전함을 내보내야 한다는 것. 양측의 결론이 맞물리며, 전투는 다음 단계로 향하고 있었다.
한편 이 소란의 한가운데서 루이나 해군 인사에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HX-84 사태 직후 소집된 전훈 분석 회의에서, 예비역 편입 대기 상태나 다름없던 한 제독이 작성한 보고서가 수뇌부의 책상에 올라온 것이다. 보고서의 결론은 세 줄이었다. 호위 없는 선단은 선단이 아니다. 호위는 함정의 수가 아니라 체계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체계를 만들 시간은 이번 겨울뿐이다. 보고서의 서명자는 테오도르 란츠였다.
그리고 11월 5일, 이 장갑함은 대서양 한복판에서 루이나로 향하던 37척 규모의 호송선단 HX-84와 조우했다. 호송선단화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선단의 호위 전력은 14cm 포 몇 문을 얹은 무장상선순양함 저비스베이 단 1척. 장갑함의 실루엣이 수평선에 나타난 순간, 선단의 운명은 산술적으로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호위함장의 판단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선단에 산개와 연막 전개를 명령한 뒤, 자함의 뱃머리를 장갑함 쪽으로 돌렸다. 사거리도, 장갑도, 속력도 상대가 되지 않는 돌격이었다. 장갑함의 주포탄이 명중하기 시작한 뒤에도 호위함은 침로를 바꾸지 않았고, 함교가 날아가고 선체가 불덩이가 된 상태로도 40여 분을 버티며 계속 전진했다. 이 40분 동안 선단의 상선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연막과 스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호위함이 마침내 침몰했을 때, 장갑함이 해가 지기 전까지 따라잡아 격침한 상선은 12척이었다. 나머지 25척은 밤바다 속으로 사라져 살아남았다.
저비스베이의 최후는 즉시 전설이 되었다. 함장에게는 사후 최고 무공훈장이 추서되었고, 생존 승조원들의 증언은 신문 1면과 라디오, 뉴스 영화를 타고 연합국 전역에 퍼졌다. 침몰 직전까지 마스트에 군함기가 걸려 있었다는 증언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되었다. 위장순양함 시기의 공포와 무력감에 짓눌려 있던 루이나 여론에게 이 이야기는 처음으로 주어진 '싸우다 죽은 이야기'였고, 전쟁 채권 포스터부터 신병 모집 광고까지 어디에나 그 이름이 등장했다. 격침당한 쪽이 승리의 상징이 되는 역설이었다.
그러나 해군 내부의 결산은 냉정했다. HX-84의 손실 자체보다 심각한 것은 그 여파였다. 장갑함이 대서양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후 2주간 모든 호송선단의 출항이 중지되었고, 이미 항해 중이던 선단들은 항로를 대폭 우회하느라 수송 일정 전체가 연쇄적으로 붕괴했다. 단 한 척의 습격함이 격침한 것은 상선 12척이지만, 마비시킨 것은 루이나의 해상 수송 체계 전체였던 것이다. 문제의 장갑함은 이후로도 남대서양과 인도양을 5개월간 유유히 누비며 상선 16척을 추가로 격침하고, 연합군 수색 전대들을 조롱하듯 따돌린 끝에 이듬해 봄 본국으로 무사 귀환했다. 단일 수상함 통상파괴 작전으로는 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가장 성공적인 사례였다.
HX-84는 양측 모두의 교리를 바꿔 놓았다. 연합군 측이 얻은 교훈은 명확했다. "전함급 습격함에는 전함급 호위가 필요하다." 이후 주요 선단에는 구식 전함이나 순양전함이 1척씩 배속되기 시작했고, 실제로 12월 랜드 내해 어귀에서 출격을 시도하던 독일 순양전함 전대가 호송선단 호위로 붙어 있던 구식 전함 1척을 발견하고는 교전을 포기한 채 회항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 처방의 효과가 입증되었다. 독일 측 수뇌부도 같은 장면에서 반대 방향의 결론을 끌어냈다. 구식 전함 호위를 정면에서 제압하려면 장갑함이 아니라 고속전함을 내보내야 한다는 것. 양측의 결론이 맞물리며, 전투는 다음 단계로 향하고 있었다.
한편 이 소란의 한가운데서 루이나 해군 인사에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HX-84 사태 직후 소집된 전훈 분석 회의에서, 예비역 편입 대기 상태나 다름없던 한 제독이 작성한 보고서가 수뇌부의 책상에 올라온 것이다. 보고서의 결론은 세 줄이었다. 호위 없는 선단은 선단이 아니다. 호위는 함정의 수가 아니라 체계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체계를 만들 시간은 이번 겨울뿐이다. 보고서의 서명자는 테오도르 란츠였다.
3.4. 란츠 개혁: 호송선단 체계의 확립 (1940년 12월~1941년 1월) [편집]
1940년 12월 2일, 테오도르 란츠 제독이 신설된 해상교통로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3년 전 "패배주의자"로 낙인찍혀 한직으로 밀려났던 인물이 이제 해군에서 가장 많은 함정과 예산을 지휘하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취임사는 2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전투에서 이기는 법을 배우러 모인 것이 아닙니다. 지지 않고 버티는 법을 배우러 모인 것입니다. 이 전쟁의 승패는 격침한 적함의 수가 아니라, 도착한 상선의 수로 계산될 것입니다."
란츠가 취임 첫 달에 밀어붙인 조치는 세 가지였다. 첫째, 속력 13노트 이상의 쾌속선을 제외한 모든 상선의 독립 항행 전면 금지. 둘째, 호송선단의 표준화. 그때까지 항구와 선사 사정에 따라 임의로 편성되던 선단을 규격화된 항로와 고정된 출발 주기, 통일된 신호 체계와 대형 교범 아래 재편했고, 호위함들도 그때그때 긁어모으는 방식에서 벗어나 함장들이 서로의 습관까지 아는 상설 호위전대 단위로 묶었다. 셋째, 가장 논쟁적이었던 상선 건조·수리 능력의 국가 통제 편입. 조선소의 선대 배정과 자재 배급, 심지어 건조할 선형의 결정권까지 사령부가 가져가는, 사실상의 해운·조선업 전시 국유화였다.
반발은 예상대로 격렬했다. 선사들은 선단 대기로 인한 운항 손실을 들어 소송을 예고했고, 조선업계는 "군인이 조선소를 경영하겠다는 발상"이라며 로비전에 나섰으며, 해군 내부에서조차 주력 함대의 구축함을 호위전대로 차출하는 데 대한 항명성 반발이 터져 나왔다. 12월 말 의회 청문회는 이 갈등의 정점이었다. 선단 체계가 오히려 수송 효율을 떨어뜨린다는 의원의 추궁에 란츠는 준비해 온 도표 한 장을 들어 보였다. 독립 항행선과 선단 소속선의 생존율 비교였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느리게 도착하는 배와 도착하지 못하는 배 중에서 고르라면, 저는 느린 배를 고르겠습니다. 배는 다시 만들 수 있지만 바닷길은 한번 끊기면 되찾을 수 없습니다."
개혁의 실무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령부가 가장 먼저 만든 것은 함정이 아니라 상황실이었다. 랜드 내해와 대서양 전역의 모든 선단과 호위전대, 그리고 보고된 적함 위치를 실시간으로 표시하는 거대한 도상 지도가 설치되었고, 상선 선장 출신 예비역과 여성 통신 요원 수백 명이 이 '바다의 장부'를 24시간 갱신했다. 항로 결정은 감이 아니라 통계의 영역이 되었다. 습격 보고의 분포, 계절별 기상, 적함의 항속거리 추정치가 겹쳐진 위험도 지도 위에서 선단 항로가 매주 다시 그려졌다. 훗날 한 참모는 이 상황실을 두고 "란츠 개혁의 본질은 호위함 몇 척이 아니라, 바다 전체를 하나의 장부로 만든 것"이라고 요약했다.
조선 부문의 성과는 더 극적이었다. 사령부는 상선 선형을 표준 화물선 단 두 종으로 통일하고, 곡선 강판을 최소화한 단순 설계와 블록 공법, 용접 공정의 전면 도입을 강행했다. 조선업계가 "떠다니는 깡통"이라 조롱하던 이 표준선의 첫 배는 착공에서 진수까지 150일이 걸렸으나, 반년 뒤에는 70일로, 전투 말기에는 한 달 남짓으로 단축된다. 수리 부문에서도 전국 도크의 통합 배정제가 시행되어, 손상함이 수리 순번을 기다리며 항구에 묶여 있는 평균 기간이 3분의 1로 줄었다. 격침되는 속도보다 만들고 고치는 속도가 빨라지는 순간 통상파괴전은 산수에서 패배한다는 것, 이것이 란츠 개혁의 최종 병기였다.
물론 1941년 1월의 시점에서 이 모든 것은 아직 설계도에 가까웠다. 상설 호위전대는 편성표만 존재하는 부대가 태반이었고, 표준선 1번함은 아직 선대 위에 있었으며, 상황실의 위험도 지도는 데이터 부족으로 절반이 공백이었다. 개혁이 열매를 맺으려면 최소한 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독일 해군은 그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상황실의 지도가 채 완성되기도 전인 1월 하순, 도상에 표시된 적 없는 두 개의 고속 항적이 북부 초계망의 공백을 뚫고 랜드 내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귄터 뤼첸스의 함대였다.
란츠가 취임 첫 달에 밀어붙인 조치는 세 가지였다. 첫째, 속력 13노트 이상의 쾌속선을 제외한 모든 상선의 독립 항행 전면 금지. 둘째, 호송선단의 표준화. 그때까지 항구와 선사 사정에 따라 임의로 편성되던 선단을 규격화된 항로와 고정된 출발 주기, 통일된 신호 체계와 대형 교범 아래 재편했고, 호위함들도 그때그때 긁어모으는 방식에서 벗어나 함장들이 서로의 습관까지 아는 상설 호위전대 단위로 묶었다. 셋째, 가장 논쟁적이었던 상선 건조·수리 능력의 국가 통제 편입. 조선소의 선대 배정과 자재 배급, 심지어 건조할 선형의 결정권까지 사령부가 가져가는, 사실상의 해운·조선업 전시 국유화였다.
반발은 예상대로 격렬했다. 선사들은 선단 대기로 인한 운항 손실을 들어 소송을 예고했고, 조선업계는 "군인이 조선소를 경영하겠다는 발상"이라며 로비전에 나섰으며, 해군 내부에서조차 주력 함대의 구축함을 호위전대로 차출하는 데 대한 항명성 반발이 터져 나왔다. 12월 말 의회 청문회는 이 갈등의 정점이었다. 선단 체계가 오히려 수송 효율을 떨어뜨린다는 의원의 추궁에 란츠는 준비해 온 도표 한 장을 들어 보였다. 독립 항행선과 선단 소속선의 생존율 비교였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느리게 도착하는 배와 도착하지 못하는 배 중에서 고르라면, 저는 느린 배를 고르겠습니다. 배는 다시 만들 수 있지만 바닷길은 한번 끊기면 되찾을 수 없습니다."
개혁의 실무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령부가 가장 먼저 만든 것은 함정이 아니라 상황실이었다. 랜드 내해와 대서양 전역의 모든 선단과 호위전대, 그리고 보고된 적함 위치를 실시간으로 표시하는 거대한 도상 지도가 설치되었고, 상선 선장 출신 예비역과 여성 통신 요원 수백 명이 이 '바다의 장부'를 24시간 갱신했다. 항로 결정은 감이 아니라 통계의 영역이 되었다. 습격 보고의 분포, 계절별 기상, 적함의 항속거리 추정치가 겹쳐진 위험도 지도 위에서 선단 항로가 매주 다시 그려졌다. 훗날 한 참모는 이 상황실을 두고 "란츠 개혁의 본질은 호위함 몇 척이 아니라, 바다 전체를 하나의 장부로 만든 것"이라고 요약했다.
조선 부문의 성과는 더 극적이었다. 사령부는 상선 선형을 표준 화물선 단 두 종으로 통일하고, 곡선 강판을 최소화한 단순 설계와 블록 공법, 용접 공정의 전면 도입을 강행했다. 조선업계가 "떠다니는 깡통"이라 조롱하던 이 표준선의 첫 배는 착공에서 진수까지 150일이 걸렸으나, 반년 뒤에는 70일로, 전투 말기에는 한 달 남짓으로 단축된다. 수리 부문에서도 전국 도크의 통합 배정제가 시행되어, 손상함이 수리 순번을 기다리며 항구에 묶여 있는 평균 기간이 3분의 1로 줄었다. 격침되는 속도보다 만들고 고치는 속도가 빨라지는 순간 통상파괴전은 산수에서 패배한다는 것, 이것이 란츠 개혁의 최종 병기였다.
물론 1941년 1월의 시점에서 이 모든 것은 아직 설계도에 가까웠다. 상설 호위전대는 편성표만 존재하는 부대가 태반이었고, 표준선 1번함은 아직 선대 위에 있었으며, 상황실의 위험도 지도는 데이터 부족으로 절반이 공백이었다. 개혁이 열매를 맺으려면 최소한 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독일 해군은 그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상황실의 지도가 채 완성되기도 전인 1월 하순, 도상에 표시된 적 없는 두 개의 고속 항적이 북부 초계망의 공백을 뚫고 랜드 내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귄터 뤼첸스의 함대였다.
3.5. 뤼첸스의 내해 침입 작전 (1941년 1월~3월) [편집]
1941년 1월 22일 밤, 귄터 뤼첸스 제독이 지휘하는 고속전함 2척이 폭풍설에 몸을 숨긴 채 북부 초계선을 통과했다. 첫 시도는 아니었다. 한 달 전 같은 해역에서 연합군 순양함에 조기 발견되어 회항한 전례가 있었고, 이번에는 그 실패에서 배운 대로 최악의 기상을 골라, 초계함들이 파도에 밀려 배치선을 이탈한 틈을 정확히 찔렀다. 연합군이 침입 사실을 인지한 것은 나흘 뒤, 첫 희생자의 조난 신호가 끊긴 채 수신되었을 때였다. 란츠의 상황실 지도 위에 처음으로 '위치 불명의 전함 2척'이라는 최악의 표지가 올라갔다.
뤼첸스의 작전 지침은 냉철함 그 자체였다. 목표는 적함의 격침이 아니라 통상의 파괴이며, 따라서 대등한 전력과의 교전은 그것이 승산이 있는 경우라도 회피한다. 함대의 존재 가치는 침몰시킨 톤수가 아니라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만들어내는 마비에 있다. 실제로 2월 초 첫 대규모 조우에서 뤼첸스는 이 원칙을 증명해 보였다. 포착한 호송선단의 후미에 구식 전함 1척이 호위로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자,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였음에도 미련 없이 반전 이탈한 것이다. 참모들의 항의에 그가 남긴 답은 짧았다. "우리 배에 구멍이 하나 나면, 그 구멍을 메울 도크는 3,000km 밖에 있다."
대신 뤼첸스은 호위가 붙지 않은 곳을 때렸다. 함재 정찰기와 사전 배치된 보급함망, 그리고 무선 방수반을 활용해 선단의 집결 해역과 해산 지점, 즉 호위 체계의 이음매를 노렸고, 2월 중순부터 3월 초까지 호위 편성이 완료되기 전의 선단 3개를 연달아 격멸했다. 두 척의 전함이 선단을 양쪽에서 몰아넣고 주포와 부포로 상선들을 차례로 지워나가는 광경은 생존자들에 의해 "도살"로 증언되었다. 두 달의 작전 기간 동안 격침 상선 60여 척, 총 32만 톤. 단일 수상함 작전으로는 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최대의 전과였다.
그러나 톤수는 이 작전이 입힌 피해의 절반도 설명하지 못한다. '위치 불명의 전함 2척'이 지도 위에 존재하는 동안, 란츠의 사령부는 확률의 지옥에 갇혔다. 어느 항로가 안전한지 알 수 없으니 모든 항로가 위험했고, 결국 2월 말부터 3월 중순까지 대서양 방면 선단의 출항이 사실상 전면 중지되었다. 3월 한 달간 루이나 주요 항구의 물동량은 평시의 4할까지 떨어졌고, 일부 도시에서 유류와 설탕의 배급이 시작되었다. 정부 내에서는 강화 교섭론이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거론되었으며, 훗날 공개된 각의 기록에는 "이런 겨울이 한 번 더 오면 전쟁의 지속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발언이 남아 있다. 전투 전 기간을 통틀어 루이나가 패배에 가장 가까이 갔던 순간이었다.
연합군의 추격은 여섯 차례나 뤼첸스의 그림자를 밟았으나 여섯 차례 모두 놓쳤다. 순양함이 육안 접촉에 성공한 것만 두 번이었지만, 고속전함의 속력 앞에서 접촉 유지는 번번이 실패했다. 알렉스 베렌하르트의 주력 함대는 매번 예상 요격점으로 달려갔고, 뤼첸스는 매번 그 예상의 바깥에 있었다. 3월 중순, 연료와 주포 신관의 한계에 도달한 뤼첸스는 마지막 유인 기동으로 추격 함대를 남쪽으로 끌어내린 뒤, 정반대로 북상해 점령하 프랑스의 항구로 유유히 입항했다. 두 달간의 작전에서 독일 측 손실은 전사 2명, 함체 손상 전무. 완벽하다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작전이었다.
다만 이 완벽함의 이면에는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하나는 연합군 측의 것으로, 란츠의 상황실은 이 두 달간의 참패를 데이터로 삼켰다. 뤼첸스의 항적과 습격 지점, 보급 추정 해역이 전부 지도 위에 복기되었고, 그 과정에서 독일 함대의 아킬레스건이 도출되었다. 대양에 떠 있는 보급함망, 그리고 무선 송신의 습관이었다. 다른 하나는 독일 측의 것이었다. 작전의 완벽한 성공은 해군 수뇌부의 신중론을 침묵시켰고, "고속전함 전대는 랜드 내해에서 무적"이라는 확신이 에리히 레더로 하여금 갓 취역한 최신예 전함의 조기 투입을 결정하게 만들었다. 함대사령관에는 당연하다는 듯 뤼첸스가 재지명되었다. 회고에 따르면 뤼첸스는 출격 전 지인에게 "같은 주사위를 두 번 던져 두 번 이기는 도박사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두 번째 주사위가 던져진 것이 1941년 5월이었다.
뤼첸스의 작전 지침은 냉철함 그 자체였다. 목표는 적함의 격침이 아니라 통상의 파괴이며, 따라서 대등한 전력과의 교전은 그것이 승산이 있는 경우라도 회피한다. 함대의 존재 가치는 침몰시킨 톤수가 아니라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만들어내는 마비에 있다. 실제로 2월 초 첫 대규모 조우에서 뤼첸스는 이 원칙을 증명해 보였다. 포착한 호송선단의 후미에 구식 전함 1척이 호위로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자,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였음에도 미련 없이 반전 이탈한 것이다. 참모들의 항의에 그가 남긴 답은 짧았다. "우리 배에 구멍이 하나 나면, 그 구멍을 메울 도크는 3,000km 밖에 있다."
대신 뤼첸스은 호위가 붙지 않은 곳을 때렸다. 함재 정찰기와 사전 배치된 보급함망, 그리고 무선 방수반을 활용해 선단의 집결 해역과 해산 지점, 즉 호위 체계의 이음매를 노렸고, 2월 중순부터 3월 초까지 호위 편성이 완료되기 전의 선단 3개를 연달아 격멸했다. 두 척의 전함이 선단을 양쪽에서 몰아넣고 주포와 부포로 상선들을 차례로 지워나가는 광경은 생존자들에 의해 "도살"로 증언되었다. 두 달의 작전 기간 동안 격침 상선 60여 척, 총 32만 톤. 단일 수상함 작전으로는 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최대의 전과였다.
그러나 톤수는 이 작전이 입힌 피해의 절반도 설명하지 못한다. '위치 불명의 전함 2척'이 지도 위에 존재하는 동안, 란츠의 사령부는 확률의 지옥에 갇혔다. 어느 항로가 안전한지 알 수 없으니 모든 항로가 위험했고, 결국 2월 말부터 3월 중순까지 대서양 방면 선단의 출항이 사실상 전면 중지되었다. 3월 한 달간 루이나 주요 항구의 물동량은 평시의 4할까지 떨어졌고, 일부 도시에서 유류와 설탕의 배급이 시작되었다. 정부 내에서는 강화 교섭론이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거론되었으며, 훗날 공개된 각의 기록에는 "이런 겨울이 한 번 더 오면 전쟁의 지속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발언이 남아 있다. 전투 전 기간을 통틀어 루이나가 패배에 가장 가까이 갔던 순간이었다.
연합군의 추격은 여섯 차례나 뤼첸스의 그림자를 밟았으나 여섯 차례 모두 놓쳤다. 순양함이 육안 접촉에 성공한 것만 두 번이었지만, 고속전함의 속력 앞에서 접촉 유지는 번번이 실패했다. 알렉스 베렌하르트의 주력 함대는 매번 예상 요격점으로 달려갔고, 뤼첸스는 매번 그 예상의 바깥에 있었다. 3월 중순, 연료와 주포 신관의 한계에 도달한 뤼첸스는 마지막 유인 기동으로 추격 함대를 남쪽으로 끌어내린 뒤, 정반대로 북상해 점령하 프랑스의 항구로 유유히 입항했다. 두 달간의 작전에서 독일 측 손실은 전사 2명, 함체 손상 전무. 완벽하다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작전이었다.
다만 이 완벽함의 이면에는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하나는 연합군 측의 것으로, 란츠의 상황실은 이 두 달간의 참패를 데이터로 삼켰다. 뤼첸스의 항적과 습격 지점, 보급 추정 해역이 전부 지도 위에 복기되었고, 그 과정에서 독일 함대의 아킬레스건이 도출되었다. 대양에 떠 있는 보급함망, 그리고 무선 송신의 습관이었다. 다른 하나는 독일 측의 것이었다. 작전의 완벽한 성공은 해군 수뇌부의 신중론을 침묵시켰고, "고속전함 전대는 랜드 내해에서 무적"이라는 확신이 에리히 레더로 하여금 갓 취역한 최신예 전함의 조기 투입을 결정하게 만들었다. 함대사령관에는 당연하다는 듯 뤼첸스가 재지명되었다. 회고에 따르면 뤼첸스는 출격 전 지인에게 "같은 주사위를 두 번 던져 두 번 이기는 도박사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두 번째 주사위가 던져진 것이 1941년 5월이었다.
3.6. 루이나 해군 최악의 날 (1941년 5월 24일) [편집]
1941년 5월 18일, 뤼첸스의 함대가 두 번째 출격에 나섰다. 편성은 갓 취역한 최신예 전함 1척과 신형 중순양함 1척. 원안은 수리 중인 고속전함 2척까지 합류한 4척 편대였으나, 에리히 레더는 수리 완료를 기다리자는 뤼첸스의 건의를 기각하고 조기 출격을 명령했다. 여름이 오면 백야로 북방 돌파가 어려워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과적으로 독일 해군은 사상 최강의 전함을, 사상 최소의 호위와 함께 내보낸 셈이 되었다.
이번에는 연합군이 먼저 알았다. 중립국 주재 무관의 첩보와 항공 정찰이 노르웨이 피오르에 정박한 대형함 2척을 포착했고, 란츠의 상황실은 지난겨울 복기해 둔 뤼첸스의 항적 위에 예상 돌파로 세 개를 그려냈다. 알렉스 베렌하르트는 가용 전력을 쪼개 세 길목에 모두 배치했는데, 가장 유력한 북쪽 길목에 배정된 것이 함대 기함인 순양전함 1척과 신예 전함 1척이었다. 기함은 20년간 루이나 해군의 얼굴이자 국력의 상징으로 세계의 항구를 순방해 온 배였다. 속력과 화력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으나, 설계 사상이 낡아 수평 장갑, 즉 위에서 떨어지는 포탄에 대한 방어가 얇다는 약점이 개장 계획서에만 십수 년째 적혀 있었다.
5월 24일 새벽, 북쪽 길목의 짙은 안개 속에서 양측은 조우했다. 초계 순양함의 접촉 보고를 받은 기함 전대는 밤새 요격 침로를 달렸고, 05시 35분 수평선 위로 독일 함대의 마스트가 떠올랐다. 여기서 루이나 측 지휘관은 거리를 빠르게 좁히는 공격적인 접근을 택했다. 낙각이 큰 원거리 포격전을 피하고, 취약한 수평 장갑이 문제되지 않는 근거리 직사전으로 끌고 가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접근 침로 탓에 후부 주포탑들의 사계가 막혀, 접근이 끝날 때까지 루이나 전대는 화력의 절반만으로 싸워야 했다.
05시 52분 포문이 열렸다. 그리고 8분 뒤, 전투는 끝나 있었다. 06시 00분, 독일 전함의 다섯 번째 일제사 중 한 발이 높은 낙각으로 기함의 얇은 상갑판을 뚫고 후부 주포 탄약고에서 작렬했다. 목격자들의 증언은 일치한다. 함 중앙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마스트 높이의 몇 배로 치솟았고, 4만 톤의 선체가 등뼈가 부러지듯 두 동강 나며, 뱃머리를 하늘로 쳐든 채 3분 만에 바다 밑으로 사라졌다. 승조원 1,419명 중 구조된 것은 3명이었다. 동행하던 신예 전함도 집중 포화로 함교와 사격 통제 장치에 손상을 입고 연막 속으로 이탈했다. 독일 측 피해는 기함에 명중탄 3발. 그중 한 발이 함수 연료 탱크를 찢어 기름이 새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아침에 남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소식은 그날 오전 중으로 루이나 전역에 퍼졌다. 20년간 '가라앉지 않는 배'의 대명사였던 기함이 8분 만에, 그것도 승조원 전멸에 가까운 형태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처음에 오보로 받아들였다. 방송이 사실을 확인하자 증권 시장이 얼어붙었고, 항구 도시들에서는 자발적인 조기 게양이 번졌다. 훗날 역사가들이 '루이나 해군 최악의 날'이라 부르게 되는 이 하루의 충격은 단순한 함정 1척의 손실이 아니었다. 함대결전 교리의 파산 선고 이후에도 국민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신화, '우리 함대는 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탄약고와 함께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최악의 날은 동시에 전투 전체의 전환점이 되었다. 격침 보고를 받은 베렌하르트는 그날 정오, 전 함대에 평문에 가까운 짧은 전문을 타전했다. "독일 기함을 격침할 때까지 함대는 귀항하지 않는다." 통신 규범상 이례적인 이 전문은 의도된 것이었다. 적도 들으라고 보낸 선언이자, 충격에 빠진 함대와 국민을 향한 호소였다. 실제로 이 전문과 함께 랜드 내해와 대서양의 모든 가용 전력, 심지어 호송 임무 중이던 호위 전함들까지 차출되어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그 목표물의 함교에서 뤼첸스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눈부신 전과를 안고 작전을 계속할 것인가, 새는 연료 탱크를 안고 회항할 것인가. 그의 결정과 함께, 해전사에 남을 사흘이 시작된다.
이번에는 연합군이 먼저 알았다. 중립국 주재 무관의 첩보와 항공 정찰이 노르웨이 피오르에 정박한 대형함 2척을 포착했고, 란츠의 상황실은 지난겨울 복기해 둔 뤼첸스의 항적 위에 예상 돌파로 세 개를 그려냈다. 알렉스 베렌하르트는 가용 전력을 쪼개 세 길목에 모두 배치했는데, 가장 유력한 북쪽 길목에 배정된 것이 함대 기함인 순양전함 1척과 신예 전함 1척이었다. 기함은 20년간 루이나 해군의 얼굴이자 국력의 상징으로 세계의 항구를 순방해 온 배였다. 속력과 화력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으나, 설계 사상이 낡아 수평 장갑, 즉 위에서 떨어지는 포탄에 대한 방어가 얇다는 약점이 개장 계획서에만 십수 년째 적혀 있었다.
5월 24일 새벽, 북쪽 길목의 짙은 안개 속에서 양측은 조우했다. 초계 순양함의 접촉 보고를 받은 기함 전대는 밤새 요격 침로를 달렸고, 05시 35분 수평선 위로 독일 함대의 마스트가 떠올랐다. 여기서 루이나 측 지휘관은 거리를 빠르게 좁히는 공격적인 접근을 택했다. 낙각이 큰 원거리 포격전을 피하고, 취약한 수평 장갑이 문제되지 않는 근거리 직사전으로 끌고 가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접근 침로 탓에 후부 주포탑들의 사계가 막혀, 접근이 끝날 때까지 루이나 전대는 화력의 절반만으로 싸워야 했다.
05시 52분 포문이 열렸다. 그리고 8분 뒤, 전투는 끝나 있었다. 06시 00분, 독일 전함의 다섯 번째 일제사 중 한 발이 높은 낙각으로 기함의 얇은 상갑판을 뚫고 후부 주포 탄약고에서 작렬했다. 목격자들의 증언은 일치한다. 함 중앙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마스트 높이의 몇 배로 치솟았고, 4만 톤의 선체가 등뼈가 부러지듯 두 동강 나며, 뱃머리를 하늘로 쳐든 채 3분 만에 바다 밑으로 사라졌다. 승조원 1,419명 중 구조된 것은 3명이었다. 동행하던 신예 전함도 집중 포화로 함교와 사격 통제 장치에 손상을 입고 연막 속으로 이탈했다. 독일 측 피해는 기함에 명중탄 3발. 그중 한 발이 함수 연료 탱크를 찢어 기름이 새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아침에 남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소식은 그날 오전 중으로 루이나 전역에 퍼졌다. 20년간 '가라앉지 않는 배'의 대명사였던 기함이 8분 만에, 그것도 승조원 전멸에 가까운 형태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처음에 오보로 받아들였다. 방송이 사실을 확인하자 증권 시장이 얼어붙었고, 항구 도시들에서는 자발적인 조기 게양이 번졌다. 훗날 역사가들이 '루이나 해군 최악의 날'이라 부르게 되는 이 하루의 충격은 단순한 함정 1척의 손실이 아니었다. 함대결전 교리의 파산 선고 이후에도 국민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신화, '우리 함대는 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탄약고와 함께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최악의 날은 동시에 전투 전체의 전환점이 되었다. 격침 보고를 받은 베렌하르트는 그날 정오, 전 함대에 평문에 가까운 짧은 전문을 타전했다. "독일 기함을 격침할 때까지 함대는 귀항하지 않는다." 통신 규범상 이례적인 이 전문은 의도된 것이었다. 적도 들으라고 보낸 선언이자, 충격에 빠진 함대와 국민을 향한 호소였다. 실제로 이 전문과 함께 랜드 내해와 대서양의 모든 가용 전력, 심지어 호송 임무 중이던 호위 전함들까지 차출되어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그 목표물의 함교에서 뤼첸스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눈부신 전과를 안고 작전을 계속할 것인가, 새는 연료 탱크를 안고 회항할 것인가. 그의 결정과 함께, 해전사에 남을 사흘이 시작된다.
3.7. 사흘간의 추격전 (1941년 5월 24일~27일) [편집]
3.7.1. 5/24 [편집]
06시 03분, 리퍼블릭(RNS Republic)의 함수가 수면 아래로 사라진 직후부터 이날 하루는 양측 모두에게 결정의 연속이었다.
첫 결정은 승자의 함교에서 내려졌다. 보탄(KMS Wotan)의 함장은 손상을 입고 연막 속으로 이탈하는 레졸루트(RNS Resolute)를 가리키며 추격 섬멸을 건의했다. 상대는 취역 두 달의 신예함으로 주포 고장과 사격 통제 손상에 시달리고 있었고, 여기서 격침하면 루이나 해군의 신예 전함 전력을 통째로 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귄터 뤼첸스는 5분간의 침묵 끝에 이를 기각했다. 임무는 통상파괴이지 함대결전이 아니며, 교전 중 함수에 얻어맞은 명중탄 1발이 연료 탱크를 찢어 중유 1,000톤이 이미 바다에 버려진 상태였다. 08시경 뤼첸스는 참모진에 작전 중단과 프랑스 회항 방침을 통보했다. 반발이 없지 않았다. 포술장은 "해군 역사상 최대의 전과를 눈앞에 두고 등을 돌리는 것"이라 항의했으나, 뤼첸스의 답은 겨우내 그를 지배해 온 원칙의 반복이었다. "구멍 난 배로는 싸우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배에는 지금 구멍이 나 있다."
같은 시각 루이나 측에서는 정반대 방향의 결정이 내려지고 있었다. 리퍼블릭의 침몰 보고,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생존자 3명'이라는 신호를 접수한 함대사령부는 한때 침묵에 잠겼다고 전해진다. 그 침묵을 깬 것이 정오에 알렉스 베렌하르트가 전 함대에 타전한 전문이었다. "독일 기함을 격침할 때까지 함대는 귀항하지 않는다." 암호화를 최소화한 이례적인 평문 전송으로, 적도 들으라고 보낸 선언이었다. 전문과 동시에 함대의 재배치가 시작되었다. 리버티(RNS Liberty)를 기함으로 하는 본대가 남서로 침로를 꺾었고, 지브롤터 방면에서 항모 페레그린(RNS Peregrine)을 포함한 별동대가 북상을 개시했으며, 호송 임무에 붙어 있던 구식 전함들까지 선단에서 떼어내 예상 항로의 길목마다 배치되었다. 이날 하루 동안 보탄 한 척을 향해 재배치된 연합군 함정은 전함·순양전함 5척, 항모 2척, 순양함 11척, 구축함 21척에 달했다.
추격의 실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두 척의 중순양함 덕분이었다. 새벽의 참극을 처음부터 지켜본 페어헤이븐(RNS Fairhaven)과 스톤헤이븐(RNS Stonehaven)은 리퍼블릭 침몰 후에도 이탈하지 않고, 신형 탐지 장비의 유효 거리 끝자락에 매달려 보탄의 뒤를 밟았다. 안개와 스콜이 번갈아 시야를 지우는 해역에서 두 순양함은 30분 간격으로 위치 보고를 중계했고, 이 보고선이 이날 연합군 전체의 눈 역할을 했다. 보탄 측도 이를 모르지 않아, 오후 들어 두 차례 스콜을 방패 삼아 반전해 주포 일제사를 퍼부었으나, 순양함들은 연막을 치고 사거리 밖으로 물러났다가 스콜이 지나가면 다시 수평선 위에 마스트를 세웠다. 독일 승조원들 사이에서 두 순양함에 '그림자(Schatten)'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 이날이다.
오후 늦게는 이날의 마지막 교전이 벌어졌다. 응급 수리를 마친 레졸루트가 순양함들의 보고선을 따라잡아 원거리에서 재차 포문을 연 것이다. 젊은 함장이 독단에 가깝게 감행한 이 재교전은 명중탄 없이 30분 만에 끝났고, 주포 고장이 재발한 레졸루트는 결국 추격선에서 이탈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전과는 없었으나 의미가 없지도 않았다. 이 교전 동안 회피 기동을 강요당한 보탄의 속력이 일시적으로 떨어졌고, 무엇보다 함수 파공부에 해수가 추가로 밀려들며 침수 구획이 넓어져, 최대 속력이 28노트로 제한되기에 이르렀다. 사흘 뒤의 산수를 결정짓는 2노트였다.
해가 진 뒤, 뤼첸스는 이날의 마지막 수를 두었다. 22시경 스콜 지대에 진입하는 순간 보탄이 갑자기 감속하며 반전, 추적 순양함들을 향해 위협 사격을 가했고, 그 소란의 그늘에서 무상인 중순양함 롤란트(KMS Roland)가 조용히 전대를 이탈해 남쪽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롤란트를 단독 통상파괴에 내보내고 추격의 시선을 보탄 한 척에 모으는, 계획된 분리 기동이었다. 페어헤이븐의 탐지 요원들은 표적이 하나로 줄어든 것을 몇 시간 뒤에야 알아차렸다. 이로써 24일 자정, 무대 위에는 기름띠를 끌며 프랑스로 향하는 손상 전함 한 척과, 대양 전역에서 그 한 점을 향해 모여드는 함대들만이 남았다. 그러나 이 추격의 실은, 다음 날 아침 가장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끊어지게 된다.
첫 결정은 승자의 함교에서 내려졌다. 보탄(KMS Wotan)의 함장은 손상을 입고 연막 속으로 이탈하는 레졸루트(RNS Resolute)를 가리키며 추격 섬멸을 건의했다. 상대는 취역 두 달의 신예함으로 주포 고장과 사격 통제 손상에 시달리고 있었고, 여기서 격침하면 루이나 해군의 신예 전함 전력을 통째로 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귄터 뤼첸스는 5분간의 침묵 끝에 이를 기각했다. 임무는 통상파괴이지 함대결전이 아니며, 교전 중 함수에 얻어맞은 명중탄 1발이 연료 탱크를 찢어 중유 1,000톤이 이미 바다에 버려진 상태였다. 08시경 뤼첸스는 참모진에 작전 중단과 프랑스 회항 방침을 통보했다. 반발이 없지 않았다. 포술장은 "해군 역사상 최대의 전과를 눈앞에 두고 등을 돌리는 것"이라 항의했으나, 뤼첸스의 답은 겨우내 그를 지배해 온 원칙의 반복이었다. "구멍 난 배로는 싸우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배에는 지금 구멍이 나 있다."
같은 시각 루이나 측에서는 정반대 방향의 결정이 내려지고 있었다. 리퍼블릭의 침몰 보고,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생존자 3명'이라는 신호를 접수한 함대사령부는 한때 침묵에 잠겼다고 전해진다. 그 침묵을 깬 것이 정오에 알렉스 베렌하르트가 전 함대에 타전한 전문이었다. "독일 기함을 격침할 때까지 함대는 귀항하지 않는다." 암호화를 최소화한 이례적인 평문 전송으로, 적도 들으라고 보낸 선언이었다. 전문과 동시에 함대의 재배치가 시작되었다. 리버티(RNS Liberty)를 기함으로 하는 본대가 남서로 침로를 꺾었고, 지브롤터 방면에서 항모 페레그린(RNS Peregrine)을 포함한 별동대가 북상을 개시했으며, 호송 임무에 붙어 있던 구식 전함들까지 선단에서 떼어내 예상 항로의 길목마다 배치되었다. 이날 하루 동안 보탄 한 척을 향해 재배치된 연합군 함정은 전함·순양전함 5척, 항모 2척, 순양함 11척, 구축함 21척에 달했다.
추격의 실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두 척의 중순양함 덕분이었다. 새벽의 참극을 처음부터 지켜본 페어헤이븐(RNS Fairhaven)과 스톤헤이븐(RNS Stonehaven)은 리퍼블릭 침몰 후에도 이탈하지 않고, 신형 탐지 장비의 유효 거리 끝자락에 매달려 보탄의 뒤를 밟았다. 안개와 스콜이 번갈아 시야를 지우는 해역에서 두 순양함은 30분 간격으로 위치 보고를 중계했고, 이 보고선이 이날 연합군 전체의 눈 역할을 했다. 보탄 측도 이를 모르지 않아, 오후 들어 두 차례 스콜을 방패 삼아 반전해 주포 일제사를 퍼부었으나, 순양함들은 연막을 치고 사거리 밖으로 물러났다가 스콜이 지나가면 다시 수평선 위에 마스트를 세웠다. 독일 승조원들 사이에서 두 순양함에 '그림자(Schatten)'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 이날이다.
오후 늦게는 이날의 마지막 교전이 벌어졌다. 응급 수리를 마친 레졸루트가 순양함들의 보고선을 따라잡아 원거리에서 재차 포문을 연 것이다. 젊은 함장이 독단에 가깝게 감행한 이 재교전은 명중탄 없이 30분 만에 끝났고, 주포 고장이 재발한 레졸루트는 결국 추격선에서 이탈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전과는 없었으나 의미가 없지도 않았다. 이 교전 동안 회피 기동을 강요당한 보탄의 속력이 일시적으로 떨어졌고, 무엇보다 함수 파공부에 해수가 추가로 밀려들며 침수 구획이 넓어져, 최대 속력이 28노트로 제한되기에 이르렀다. 사흘 뒤의 산수를 결정짓는 2노트였다.
해가 진 뒤, 뤼첸스는 이날의 마지막 수를 두었다. 22시경 스콜 지대에 진입하는 순간 보탄이 갑자기 감속하며 반전, 추적 순양함들을 향해 위협 사격을 가했고, 그 소란의 그늘에서 무상인 중순양함 롤란트(KMS Roland)가 조용히 전대를 이탈해 남쪽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롤란트를 단독 통상파괴에 내보내고 추격의 시선을 보탄 한 척에 모으는, 계획된 분리 기동이었다. 페어헤이븐의 탐지 요원들은 표적이 하나로 줄어든 것을 몇 시간 뒤에야 알아차렸다. 이로써 24일 자정, 무대 위에는 기름띠를 끌며 프랑스로 향하는 손상 전함 한 척과, 대양 전역에서 그 한 점을 향해 모여드는 함대들만이 남았다. 그러나 이 추격의 실은, 다음 날 아침 가장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끊어지게 된다.
3.7.2. 5/25 [편집]
날짜가 바뀐 직후, 이번 추격전 최초의 항공 공격이 감행되었다. 본대에 앞서 달리던 항모 케스트럴(RNS Kestrel)이 보탄(KMS Wotan)과의 거리를 뇌격기의 행동반경 안까지 좁히는 데 성공한 것이다. 00시 30분, 뇌격기 9기가 어둠과 스콜 속으로 발진했다. 승조원 태반이 실전 첫 출격인 데다, 시속 130km 남짓의 구식 기체로 야간 대양 항법을 해야 하는 무리한 공격이었다. 그럼에도 뇌격대는 탐지 장비를 갖춘 선도기의 유도로 표적을 찾아냈고, 대공포화가 하늘을 찢는 가운데 파도 위 20m까지 내려가 어뢰를 뿌렸다. 명중 1발. 그러나 어뢰는 함체 중앙의 주장갑대를 때렸고, 보탄이 입은 피해는 도장이 벗겨진 정도에 그쳤다. 다만 명중의 순간 급격한 회피 기동을 반복한 대가로 함수 파공부의 응급 방수 매트가 뜯겨 나가, 침수가 다시 시작되었다. 9기는 연료가 바닥난 채 전기 모두 귀함에 성공했는데, 훗날 케스트럴의 비행장은 이 밤을 "기적이 우리 편이었던 유일한 시간"이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세 시간 뒤, 기적은 편을 바꾸었다. 03시 06분, 보탄은 겨우내 갈고닦은 그 수법을 다시 꺼내 들었다. 추적하는 페어헤이븐(RNS Fairhaven)과 스톤헤이븐(RNS Stonehaven)이 지그재그 초계 기동의 바깥쪽 다리를 도는, 탐지 공백이 가장 길어지는 순간을 노려 우현으로 크게 원을 그리듯 변침한 것이다. 보탄은 추적자들의 후방을 가로질러 완전히 반대 반향으로 빠져나갔고, 04시 01분 페어헤이븐의 탐지 화면에서 표적 휘점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스콜에 의한 일시적 소실로 여겨졌으나, 두 시간의 수색에도 접촉은 회복되지 않았다. 06시, 란츠의 상황실 지도 위에서 보탄의 표지가 다시 '위치 불명'으로 바뀌었다. 겨울의 악몽, 두 달간 루이나를 마비시켰던 그 세 글자였다. 최악의 가정은 명확했다. 만약 보탄이 이대로 수리를 마치고 대서양 어딘가로 다시 사라진다면, 리퍼블릭(RNS Republic)의 1,400명은 아무 대가도 받아내지 못한 채 바다에 남겨지는 것이었다.
포위망이 허공을 움킨 그 아침, 추격을 되살린 것은 다름 아닌 뤼첸스 본인이었다. 08시 52분, 보탄의 무전실은 본국 사령부를 향해 30분에 걸친 장문의 전황 보고를 송신하기 시작했다. 리퍼블릭 격침의 상보, 자함의 손상 목록, 탐지 장비 대응 전훈까지 담긴 상세한 보고였다. 문제는 그 송신이 이루어진 이유였다. 뤼첸스는 새벽의 이탈 기동이 성공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지난 24시간 내내 탐지 장비에 물려 있던 경험 탓에 그는 여전히 추적당하고 있다고 확신했고, '어차피 위치가 노출된 이상' 무선 침묵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겨우내 란츠의 상황실이 독일 함대의 아킬레스건으로 지목해 둔 무선 습관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나쁜 형태로 도진 셈이었다. 대서양 연안에 늘어선 방향 탐지국들이 일제히 이 송신의 방위를 물었고, 09시 30분경 상황실의 지도 위에는 교차 방위선들이 만드는 좁은 다각형이 그려졌다. 보탄은 살아 있었고, 남동쪽, 즉 프랑스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의 연합군은 이 선물을 받아 들고도 반나절을 헛되이 태웠다. 방위 측정 결과가 본대 기함 리버티(RNS Liberty)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도상 작업의 착오가 겹치며, 참모진이 교차점을 실제보다 수백 킬로미터 북쪽으로 잘못 산출한 것이다. 보탄이 북방 항로로 귀환한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알렉스 베렌하르트의 본대는 07시간 동안 정반대에 가까운 북동 침로로 항주했다. 오후 늦게 상황실의 재검산과 추가 방수(傍受)가 착오를 바로잡았을 때, 본대와 보탄의 거리는 회복이 불가능할 만큼 벌어져 있었다. 이 시점에서 산수는 잔인해졌다. 보탄의 침로와 28노트의 속력을 대입하면, 27일 새벽에는 독일 공군의 엄호권과 유보트 초계선 안으로 들어간다. 본대의 전함들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 그 앞을 막아설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남쪽에서 북상 중인 별동대, 그중에서도 항모 페레그린(RNS Peregrine)의 함재기뿐이었다. 베렌하르트가 이날 밤 일지에 남긴 문장은 한 줄이었다. "이제 함대의 운명이 복엽기 조종사들의 어깨 위에 있다."
한편 이 모든 소동의 중심에서, 보탄의 함내는 기묘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뤼첸스의 쉰두 번째 생일이었다. 아침에는 본국의 총통 명의로 축전이 도착했고, 승조원들은 리퍼블릭 격침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사령관의 생일을 자축했다. 그러나 정오, 함내 방송에 직접 나선 뤼첸스의 연설은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적 함대 전체가 자신들을 쫓고 있으며, 앞으로의 싸움은 "이기느냐 지느냐가 아니라, 승리냐 죽음이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직한 상황 인식이었으나 병사들이 듣기에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고, 생존자들은 이 연설 이후 함내의 공기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고 입을 모은다. 함장이 뒤늦게 갑판을 돌며 "프랑스까지는 하루 반이면 닿는다"고 다독여야 했을 정도였다. 그날 밤 보탄은 등화를 완전히 지운 채 남동으로 달렸고, 수평선 어디에도 추적자의 그림자는 없었다. 프랑스까지 남은 거리는 약 700해리. 이대로라면, 뤼첸스는 이번에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시간 뒤, 기적은 편을 바꾸었다. 03시 06분, 보탄은 겨우내 갈고닦은 그 수법을 다시 꺼내 들었다. 추적하는 페어헤이븐(RNS Fairhaven)과 스톤헤이븐(RNS Stonehaven)이 지그재그 초계 기동의 바깥쪽 다리를 도는, 탐지 공백이 가장 길어지는 순간을 노려 우현으로 크게 원을 그리듯 변침한 것이다. 보탄은 추적자들의 후방을 가로질러 완전히 반대 반향으로 빠져나갔고, 04시 01분 페어헤이븐의 탐지 화면에서 표적 휘점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스콜에 의한 일시적 소실로 여겨졌으나, 두 시간의 수색에도 접촉은 회복되지 않았다. 06시, 란츠의 상황실 지도 위에서 보탄의 표지가 다시 '위치 불명'으로 바뀌었다. 겨울의 악몽, 두 달간 루이나를 마비시켰던 그 세 글자였다. 최악의 가정은 명확했다. 만약 보탄이 이대로 수리를 마치고 대서양 어딘가로 다시 사라진다면, 리퍼블릭(RNS Republic)의 1,400명은 아무 대가도 받아내지 못한 채 바다에 남겨지는 것이었다.
포위망이 허공을 움킨 그 아침, 추격을 되살린 것은 다름 아닌 뤼첸스 본인이었다. 08시 52분, 보탄의 무전실은 본국 사령부를 향해 30분에 걸친 장문의 전황 보고를 송신하기 시작했다. 리퍼블릭 격침의 상보, 자함의 손상 목록, 탐지 장비 대응 전훈까지 담긴 상세한 보고였다. 문제는 그 송신이 이루어진 이유였다. 뤼첸스는 새벽의 이탈 기동이 성공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지난 24시간 내내 탐지 장비에 물려 있던 경험 탓에 그는 여전히 추적당하고 있다고 확신했고, '어차피 위치가 노출된 이상' 무선 침묵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겨우내 란츠의 상황실이 독일 함대의 아킬레스건으로 지목해 둔 무선 습관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나쁜 형태로 도진 셈이었다. 대서양 연안에 늘어선 방향 탐지국들이 일제히 이 송신의 방위를 물었고, 09시 30분경 상황실의 지도 위에는 교차 방위선들이 만드는 좁은 다각형이 그려졌다. 보탄은 살아 있었고, 남동쪽, 즉 프랑스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의 연합군은 이 선물을 받아 들고도 반나절을 헛되이 태웠다. 방위 측정 결과가 본대 기함 리버티(RNS Liberty)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도상 작업의 착오가 겹치며, 참모진이 교차점을 실제보다 수백 킬로미터 북쪽으로 잘못 산출한 것이다. 보탄이 북방 항로로 귀환한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알렉스 베렌하르트의 본대는 07시간 동안 정반대에 가까운 북동 침로로 항주했다. 오후 늦게 상황실의 재검산과 추가 방수(傍受)가 착오를 바로잡았을 때, 본대와 보탄의 거리는 회복이 불가능할 만큼 벌어져 있었다. 이 시점에서 산수는 잔인해졌다. 보탄의 침로와 28노트의 속력을 대입하면, 27일 새벽에는 독일 공군의 엄호권과 유보트 초계선 안으로 들어간다. 본대의 전함들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 그 앞을 막아설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남쪽에서 북상 중인 별동대, 그중에서도 항모 페레그린(RNS Peregrine)의 함재기뿐이었다. 베렌하르트가 이날 밤 일지에 남긴 문장은 한 줄이었다. "이제 함대의 운명이 복엽기 조종사들의 어깨 위에 있다."
한편 이 모든 소동의 중심에서, 보탄의 함내는 기묘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뤼첸스의 쉰두 번째 생일이었다. 아침에는 본국의 총통 명의로 축전이 도착했고, 승조원들은 리퍼블릭 격침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사령관의 생일을 자축했다. 그러나 정오, 함내 방송에 직접 나선 뤼첸스의 연설은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적 함대 전체가 자신들을 쫓고 있으며, 앞으로의 싸움은 "이기느냐 지느냐가 아니라, 승리냐 죽음이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직한 상황 인식이었으나 병사들이 듣기에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고, 생존자들은 이 연설 이후 함내의 공기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고 입을 모은다. 함장이 뒤늦게 갑판을 돌며 "프랑스까지는 하루 반이면 닿는다"고 다독여야 했을 정도였다. 그날 밤 보탄은 등화를 완전히 지운 채 남동으로 달렸고, 수평선 어디에도 추적자의 그림자는 없었다. 프랑스까지 남은 거리는 약 700해리. 이대로라면, 뤼첸스는 이번에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3.7.3. 5/26 [편집]
운명의 재발견은 하늘에서 왔다. 10시 10분, 서부 항공관구에서 발진해 10시간째 초계 중이던 비행정 1기가 구름 사이로 내려선 순간, 조종사의 눈에 잿빛 바다 위의 검은 함영과 그 뒤로 길게 이어진 기름띠가 들어왔다. 확인을 위해 접근한 비행정은 곧바로 보탄(KMS Wotan)의 대공포화에 붙들려 동체에 파공을 얻은 채 구름 위로 도망쳐야 했으나, 타전은 이미 끝나 있었다. "전함 1척 발견." 31시간 만에 되찾은 접촉이었다. 위치를 도상에 옮긴 순간, 함대의 모든 참모가 같은 계산에 도달했다. 보탄은 예상보다 남쪽에 있었고, 프랑스까지 남은 거리와 속력으로 미루어 27일 아침이면 독일 공군의 엄호권에 진입한다. 본대의 전함들은 따라잡지 못한다. 남은 패는 단 하나, 보탄의 진로 앞쪽까지 북상해 있던 별동대의 항모 페레그린(RNS Peregrine)뿐이었다. 그 한 장의 패로 오늘 안에 보탄의 발을 묶지 못하면, 추격전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문제는 하늘과 바다의 상태였다. 이날 해역에는 폭풍에 가까운 북서풍이 불어, 페레그린의 비행갑판은 파도를 따라 15m씩 오르내리고 있었다. 함수미가 솟구칠 때마다 갑판 끝이 물보라에 잠기는 상황에서의 발함과 착함은 그 자체로 목숨을 건 곡예였다. 그럼에도 14시 50분, 뇌격기 14기로 구성된 제1차 공격대가 뜯겨 나갈 듯한 갑판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이 공격대는 이날 추격전 전체를 무위로 돌릴 뻔한 대실책을 저지른다. 저공의 비구름을 뚫고 내려온 조종사들이 탐지 장비의 휘점만 믿고 뇌격 침로에 들어갔는데, 그 표적은 보탄이 아니라 몇 시간 전 접촉 유지 임무로 단독 파견된 아군 경순양함 탤런(RNS Talon)이었던 것이다. 파견 사실이 페레그린의 비행대에 전달되지 않은 통신 계통의 구멍이 빚은 참사였다. 어뢰 11발이 아군을 향해 물살을 갈랐다. 탤런을 구한 것은 함장의 필사적인 회피 조함,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어뢰에 달린 신형 자기 신관의 결함이었다. 절반이 착수 직후의 파도에 조기 폭발했고 나머지는 전타로 피해졌다. 탤런은 끝까지 대공 사격을 봉인한 채 신호등으로 피아 식별 신호만 반복해 깜빡였고,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조종사들은 저공으로 탤런의 마스트 옆을 스치며 날개를 흔드는 것으로 사죄를 대신했다.
빈손으로 돌아온 조종사들이 격납고에서 마주한 것은 질책이 아니라 시계였다. 일몰까지 남은 시간은 세 시간 남짓. 정비사들은 전 기체의 어뢰에서 말썽 난 자기 신관을 뜯어내고 구식 접촉 신관으로 갈아 끼웠으며, 뇌격 심도도 낮춰 잡았다. 낮의 실패가 준 유일한 선물이라면, 실전과 같은 조건에서 신관 결함을 미리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19시 10분, 마지막 남은 가용기 15기가 다시 갑판을 박차고 올랐다. 조종사 태반이 낮의 오인 공격에 나갔던 그 얼굴들이었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오늘의, 그리고 이 추격전의 마지막 발함이라는 것을.
20시 47분, 제2차 공격대는 낮게 깔린 구름 밑으로 하나둘 미끄러져 내려와 보탄을 여러 방향에서 협격했다. 대공포화는 낮의 비행정을 쫓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밀도로 하늘을 메웠고, 뇌격기들은 구름과 파도 사이의 좁은 틈을 곡예하듯 누비며 어뢰를 뿌렸다. 명중은 2발이었다. 1발은 또다시 함체 중앙의 주장갑대에 막혀 물기둥만 올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물고 늘어지던 1기가 투하한 다른 1발이, 마침 어뢰 회피를 위해 좌현 전타 중이던 보탄의 함미에 꽂혔다. 폭발은 조타 기관실을 덮쳤고, 타는 좌현 12도로 꺾인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함내의 잠수부들이 침수된 조타 기관실로 들어가 필사의 복구를 시도했으나 유압 계통은 응답하지 않았고, 양현 스크루의 회전차만으로 침로를 잡으려는 시도는 폭풍의 파도가 번번이 무산시켰다. 21시 15분, 보탄의 함수는 제 의지와 무관하게 북서쪽, 즉 추격해 오는 연합군 함대의 정면을 향해 돌아갔다. 4만 7천 톤의 전함이 프랑스를 코앞에 둔 채, 바람 부는 쪽으로 크게 원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뤼첸스는 상황을 오래 오판하지 않았다. 21시 40분, 그는 본국 사령부에 짧은 전문을 보냈다. "함은 조종 불능. 최후의 포탄까지 싸우겠다." 사령부와 점령하 프랑스의 기지들이 밤새 던질 수 있는 모든 것, 유보트의 긴급 전개와 예인선 출항, 새벽의 공군 엄호를 약속했으나, 폭풍이 그 대부분을 종이 위의 약속으로 만들리라는 것은 양쪽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22시를 넘기면서, 수평선의 어둠 속에서 새로운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본대에서 앞서 파견된 구축함전대 5척이 도착한 것이다. 구축함들은 조타 불능으로 갈지자를 그리는 보탄의 주위를 에워쌌고, 자정 무렵부터 파상 뇌격을 개시했다. 보탄은 탐조등과 주포·부포의 맹사로 응수했다. 상처 입은 거함과 그 주위를 도는 다섯 척의 사냥개들, 폭풍의 밤바다 위에서 벌어진 이 소모전은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된다. 루이나 함대의 본대가 새벽의 처형장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여덟 시간이었다.
문제는 하늘과 바다의 상태였다. 이날 해역에는 폭풍에 가까운 북서풍이 불어, 페레그린의 비행갑판은 파도를 따라 15m씩 오르내리고 있었다. 함수미가 솟구칠 때마다 갑판 끝이 물보라에 잠기는 상황에서의 발함과 착함은 그 자체로 목숨을 건 곡예였다. 그럼에도 14시 50분, 뇌격기 14기로 구성된 제1차 공격대가 뜯겨 나갈 듯한 갑판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이 공격대는 이날 추격전 전체를 무위로 돌릴 뻔한 대실책을 저지른다. 저공의 비구름을 뚫고 내려온 조종사들이 탐지 장비의 휘점만 믿고 뇌격 침로에 들어갔는데, 그 표적은 보탄이 아니라 몇 시간 전 접촉 유지 임무로 단독 파견된 아군 경순양함 탤런(RNS Talon)이었던 것이다. 파견 사실이 페레그린의 비행대에 전달되지 않은 통신 계통의 구멍이 빚은 참사였다. 어뢰 11발이 아군을 향해 물살을 갈랐다. 탤런을 구한 것은 함장의 필사적인 회피 조함,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어뢰에 달린 신형 자기 신관의 결함이었다. 절반이 착수 직후의 파도에 조기 폭발했고 나머지는 전타로 피해졌다. 탤런은 끝까지 대공 사격을 봉인한 채 신호등으로 피아 식별 신호만 반복해 깜빡였고,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조종사들은 저공으로 탤런의 마스트 옆을 스치며 날개를 흔드는 것으로 사죄를 대신했다.
빈손으로 돌아온 조종사들이 격납고에서 마주한 것은 질책이 아니라 시계였다. 일몰까지 남은 시간은 세 시간 남짓. 정비사들은 전 기체의 어뢰에서 말썽 난 자기 신관을 뜯어내고 구식 접촉 신관으로 갈아 끼웠으며, 뇌격 심도도 낮춰 잡았다. 낮의 실패가 준 유일한 선물이라면, 실전과 같은 조건에서 신관 결함을 미리 확인했다는 것이었다. 19시 10분, 마지막 남은 가용기 15기가 다시 갑판을 박차고 올랐다. 조종사 태반이 낮의 오인 공격에 나갔던 그 얼굴들이었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오늘의, 그리고 이 추격전의 마지막 발함이라는 것을.
20시 47분, 제2차 공격대는 낮게 깔린 구름 밑으로 하나둘 미끄러져 내려와 보탄을 여러 방향에서 협격했다. 대공포화는 낮의 비행정을 쫓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밀도로 하늘을 메웠고, 뇌격기들은 구름과 파도 사이의 좁은 틈을 곡예하듯 누비며 어뢰를 뿌렸다. 명중은 2발이었다. 1발은 또다시 함체 중앙의 주장갑대에 막혀 물기둥만 올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물고 늘어지던 1기가 투하한 다른 1발이, 마침 어뢰 회피를 위해 좌현 전타 중이던 보탄의 함미에 꽂혔다. 폭발은 조타 기관실을 덮쳤고, 타는 좌현 12도로 꺾인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함내의 잠수부들이 침수된 조타 기관실로 들어가 필사의 복구를 시도했으나 유압 계통은 응답하지 않았고, 양현 스크루의 회전차만으로 침로를 잡으려는 시도는 폭풍의 파도가 번번이 무산시켰다. 21시 15분, 보탄의 함수는 제 의지와 무관하게 북서쪽, 즉 추격해 오는 연합군 함대의 정면을 향해 돌아갔다. 4만 7천 톤의 전함이 프랑스를 코앞에 둔 채, 바람 부는 쪽으로 크게 원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뤼첸스는 상황을 오래 오판하지 않았다. 21시 40분, 그는 본국 사령부에 짧은 전문을 보냈다. "함은 조종 불능. 최후의 포탄까지 싸우겠다." 사령부와 점령하 프랑스의 기지들이 밤새 던질 수 있는 모든 것, 유보트의 긴급 전개와 예인선 출항, 새벽의 공군 엄호를 약속했으나, 폭풍이 그 대부분을 종이 위의 약속으로 만들리라는 것은 양쪽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22시를 넘기면서, 수평선의 어둠 속에서 새로운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본대에서 앞서 파견된 구축함전대 5척이 도착한 것이다. 구축함들은 조타 불능으로 갈지자를 그리는 보탄의 주위를 에워쌌고, 자정 무렵부터 파상 뇌격을 개시했다. 보탄은 탐조등과 주포·부포의 맹사로 응수했다. 상처 입은 거함과 그 주위를 도는 다섯 척의 사냥개들, 폭풍의 밤바다 위에서 벌어진 이 소모전은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된다. 루이나 함대의 본대가 새벽의 처형장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여덟 시간이었다.
3.7.4. 5/27 [편집]
새벽, 폭풍은 여전했다. 밤새 구축함들의 뇌격은 단 한 발도 명중하지 못했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부차적인 목적이었다. 다섯 척의 사냥개들이 밤새 앗아간 것은 보탄(KMS Wotan) 승조원들의 마지막 남은 잠과 기력이었다. 닷새째 이어진 전투 배치, 세 시간 간격으로 울리는 대공·대수상 경보 속에서 병사들은 포좌와 통로 바닥에 쓰러진 채 짧은 혼절과 각성을 반복했고, 함내에는 구조도 탈출도 없으리라는 체념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새벽녘 함내 방송으로 전해진 소식, 즉 뤼첸스와 주요 장교들에 대한 기사철십자장 서훈 결정은 사기 진작을 위한 본국의 배려였으나, 한 생존자의 회고대로 그것은 "장례식의 조사처럼" 들렸다. 07시를 넘기며 비가 걷히기 시작했고, 시계가 열린 북서쪽 수평선 위로 두 개의 거대한 마스트가 떠올랐다. 알렉스 베렌하르트의 리버티(RNS Liberty)와 아이언사이드(RNS Ironside)였다.
베렌하르트는 밤사이 참모들의 야간 교전 건의를 물리치고 새벽까지 대기를 명령해 둔 터였다. "그 배는 이제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 우리는 밝은 곳에서, 확실하게 끝낸다." 08시 47분, 아이언사이드의 16인치 주포가 먼저 포문을 열었고 1분 뒤 리버티가 뒤를 이었다. 보탄도 즉각 응사에 나서, 세 번째 일제사가 아이언사이드의 함수 양옆에 물기둥을 세우는 등 초반의 포술은 죽어가는 함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정교했다. 그러나 조타 불능의 함체는 파도가 미는 대로 흔들리는 사격 플랫폼이었고, 반대로 루이나 전함들은 자유롭게 침로를 골라 T자를 그으며 다가왔다. 09시 02분, 아이언사이드의 16인치탄 1발이 보탄의 전부 함교 구조물을 직격해 사령탑과 전방 사격 통제소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 귄터 뤼첸스의 전사 시점에 대한 통설이 바로 이 명중탄으로, 이후 보탄에서는 함대 사령부 명의의 어떠한 명령도 발신되지 않았다. 같은 시각을 전후해 전부 주포탑 2기가 연달아 침묵했고, 개전 21분 만에 보탄의 조직적인 포격은 사실상 끝났다.
그 뒤에 이어진 것은 해전이라기보다 처형에 가까웠다. 거리를 좁힌 두 전함은 직사에 가까운 근거리에서 일제사를 퍼부었고, 페어헤이븐(RNS Fairhaven)과 스톤헤이븐(RNS Stonehaven)도 양 옆에서 포격에 가담했다. 400발에 가까운 대구경탄이 보탄의 상부 구조물을 차례로 갈아엎었다. 마스트가 꺾이고 굴뚝이 무너졌으며, 포탑들은 하나씩 포신을 늘어뜨린 채 불탔다. 그러나 수선 하부의 방어 구획은 끝까지 버텨, 만신창이가 된 함체는 여전히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0시를 넘기며 리버티와 아이언사이드는 연료 부족으로 더는 해역에 머물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고, 베렌하르트는 포격 중지와 본대 귀환을 명령하며 마무리를 순양함에 맡겼다. 10시 25분, 스톤헤이븐이 근거리에서 어뢰 3발을 차례로 보탄의 양현에 꽂았다. 거의 같은 시각 함내에서는 생존 장교들의 지시로 자침용 폭약이 터지고 킹스턴 밸브가 열리고 있었다. 10시 39분, 보탄은 좌현으로 천천히 넘어가더니 함미부터 바다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마지막 순간까지 함미의 군함기는 내려지지 않았고, 기울어 가는 갑판 위에서 생존자들이 바다로 뛰어드는 광경을 루이나 승조원들은 포성이 멎은 침묵 속에서 지켜보았다. 어느 쪽이 침몰의 결정타였는가, 즉 어뢰인가 자침인가를 두고는 전후 수십 년간 논쟁이 이어졌으나, 훗날 심해 탐사로 확인된 선체 상태는 양쪽 모두에 근거를 주었다. 확실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 배는 승조원들이 끝까지 싸운 뒤에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침몰 해역의 바다에는 수백 명의 생존자가 떠 있었다. 스톤헤이븐과 구축함 1척이 접근해 현측에 밧줄을 내렸고, 기름과 파도 속에서 한 명씩 끌어올리는 구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10명째를 끌어올리던 무렵, 견시가 근거리에서 잠망경으로 의심되는 물체를 보고했다. 전날부터 해역으로 전개 중이던 유보트들의 존재는 첩보로 확인된 상태였고, 정지한 순양함은 잠수함 앞에서 표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함장은 해군에서 가장 무거운 종류의 결단을 내렸다. 구조 중단, 즉시 이탈. 밧줄을 붙든 채 끌려가다 떨어져 나가는 생존자들을 뒤로하고 스톤헤이븐은 속력을 올렸다. 바다에 남겨진 이들 중 이후 독일 측 함정과 기상관측선이 추가로 건져낸 것은 5명뿐이었다. 보탄의 승조원 2,200여 명 중 최종 생존자는 115명. 리퍼블릭의 1,419명 위에 이번에는 2,000명이 얹힌 것이다. 구조 중단의 결정은 전후까지 논쟁거리로 남았으나, 리퍼블릭의 생존자가 3명이었던 전쟁에서 그 함장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소식이 전해진 그날, 루이나 의회는 회기를 중단하고 베렌하르트의 전문 전문(全文)을 낭독했다. "1941년 5월 27일 10시 39분, 함대는 약속을 지켰다." 사흘 전 "귀항하지 않는다"던 그 전문의 대구였다. 거리에는 호외가 뿌려졌고, 리퍼블릭 승조원 유족들이 항구에 모여 바다를 향해 헌화하는 사진이 이튿날 모든 신문의 1면을 채웠다. 그러나 축포의 이면에서 해군 수뇌부의 결산은 훨씬 건조했다. 최신예 전함 하나를 잡기 위해 동원된 것은 주력함 7척과 항모 2척, 순양함과 구축함 수십 척, 그리고 나흘의 시간이었다. 그 나흘 동안 호위를 뜯긴 선단들이 대서양 곳곳에서 무방비로 항해했다는 사실, 그리고 결정타가 전함의 주포가 아니라 시속 130km 복엽기의 어뢰 한 발이었다는 사실은 각기 다른 방향의 교훈을 남겼다. 어쨌든 하나의 시대가 이날 끝났다. 독일의 대형 수상함이 호위 없이 대양을 활보하던 시대, 그리고 '위치 불명의 전함'이라는 세 글자가 루이나를 마비시키던 시대였다. 다만 그 관에 마지막 못이 박히기까지는, 아직 반년의 소모전이 남아 있었다.
베렌하르트는 밤사이 참모들의 야간 교전 건의를 물리치고 새벽까지 대기를 명령해 둔 터였다. "그 배는 이제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 우리는 밝은 곳에서, 확실하게 끝낸다." 08시 47분, 아이언사이드의 16인치 주포가 먼저 포문을 열었고 1분 뒤 리버티가 뒤를 이었다. 보탄도 즉각 응사에 나서, 세 번째 일제사가 아이언사이드의 함수 양옆에 물기둥을 세우는 등 초반의 포술은 죽어가는 함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정교했다. 그러나 조타 불능의 함체는 파도가 미는 대로 흔들리는 사격 플랫폼이었고, 반대로 루이나 전함들은 자유롭게 침로를 골라 T자를 그으며 다가왔다. 09시 02분, 아이언사이드의 16인치탄 1발이 보탄의 전부 함교 구조물을 직격해 사령탑과 전방 사격 통제소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 귄터 뤼첸스의 전사 시점에 대한 통설이 바로 이 명중탄으로, 이후 보탄에서는 함대 사령부 명의의 어떠한 명령도 발신되지 않았다. 같은 시각을 전후해 전부 주포탑 2기가 연달아 침묵했고, 개전 21분 만에 보탄의 조직적인 포격은 사실상 끝났다.
그 뒤에 이어진 것은 해전이라기보다 처형에 가까웠다. 거리를 좁힌 두 전함은 직사에 가까운 근거리에서 일제사를 퍼부었고, 페어헤이븐(RNS Fairhaven)과 스톤헤이븐(RNS Stonehaven)도 양 옆에서 포격에 가담했다. 400발에 가까운 대구경탄이 보탄의 상부 구조물을 차례로 갈아엎었다. 마스트가 꺾이고 굴뚝이 무너졌으며, 포탑들은 하나씩 포신을 늘어뜨린 채 불탔다. 그러나 수선 하부의 방어 구획은 끝까지 버텨, 만신창이가 된 함체는 여전히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0시를 넘기며 리버티와 아이언사이드는 연료 부족으로 더는 해역에 머물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고, 베렌하르트는 포격 중지와 본대 귀환을 명령하며 마무리를 순양함에 맡겼다. 10시 25분, 스톤헤이븐이 근거리에서 어뢰 3발을 차례로 보탄의 양현에 꽂았다. 거의 같은 시각 함내에서는 생존 장교들의 지시로 자침용 폭약이 터지고 킹스턴 밸브가 열리고 있었다. 10시 39분, 보탄은 좌현으로 천천히 넘어가더니 함미부터 바다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마지막 순간까지 함미의 군함기는 내려지지 않았고, 기울어 가는 갑판 위에서 생존자들이 바다로 뛰어드는 광경을 루이나 승조원들은 포성이 멎은 침묵 속에서 지켜보았다. 어느 쪽이 침몰의 결정타였는가, 즉 어뢰인가 자침인가를 두고는 전후 수십 년간 논쟁이 이어졌으나, 훗날 심해 탐사로 확인된 선체 상태는 양쪽 모두에 근거를 주었다. 확실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 배는 승조원들이 끝까지 싸운 뒤에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침몰 해역의 바다에는 수백 명의 생존자가 떠 있었다. 스톤헤이븐과 구축함 1척이 접근해 현측에 밧줄을 내렸고, 기름과 파도 속에서 한 명씩 끌어올리는 구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10명째를 끌어올리던 무렵, 견시가 근거리에서 잠망경으로 의심되는 물체를 보고했다. 전날부터 해역으로 전개 중이던 유보트들의 존재는 첩보로 확인된 상태였고, 정지한 순양함은 잠수함 앞에서 표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함장은 해군에서 가장 무거운 종류의 결단을 내렸다. 구조 중단, 즉시 이탈. 밧줄을 붙든 채 끌려가다 떨어져 나가는 생존자들을 뒤로하고 스톤헤이븐은 속력을 올렸다. 바다에 남겨진 이들 중 이후 독일 측 함정과 기상관측선이 추가로 건져낸 것은 5명뿐이었다. 보탄의 승조원 2,200여 명 중 최종 생존자는 115명. 리퍼블릭의 1,419명 위에 이번에는 2,000명이 얹힌 것이다. 구조 중단의 결정은 전후까지 논쟁거리로 남았으나, 리퍼블릭의 생존자가 3명이었던 전쟁에서 그 함장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소식이 전해진 그날, 루이나 의회는 회기를 중단하고 베렌하르트의 전문 전문(全文)을 낭독했다. "1941년 5월 27일 10시 39분, 함대는 약속을 지켰다." 사흘 전 "귀항하지 않는다"던 그 전문의 대구였다. 거리에는 호외가 뿌려졌고, 리퍼블릭 승조원 유족들이 항구에 모여 바다를 향해 헌화하는 사진이 이튿날 모든 신문의 1면을 채웠다. 그러나 축포의 이면에서 해군 수뇌부의 결산은 훨씬 건조했다. 최신예 전함 하나를 잡기 위해 동원된 것은 주력함 7척과 항모 2척, 순양함과 구축함 수십 척, 그리고 나흘의 시간이었다. 그 나흘 동안 호위를 뜯긴 선단들이 대서양 곳곳에서 무방비로 항해했다는 사실, 그리고 결정타가 전함의 주포가 아니라 시속 130km 복엽기의 어뢰 한 발이었다는 사실은 각기 다른 방향의 교훈을 남겼다. 어쨌든 하나의 시대가 이날 끝났다. 독일의 대형 수상함이 호위 없이 대양을 활보하던 시대, 그리고 '위치 불명의 전함'이라는 세 글자가 루이나를 마비시키던 시대였다. 다만 그 관에 마지막 못이 박히기까지는, 아직 반년의 소모전이 남아 있었다.